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완구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키다 === 1921년 2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독단적 행동에 반발한 [[안창호]], [[박은식]], [[김창숙]] 등 임시정부 인사 14명이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요구하면서 <아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의 유지만 고집해서는 독립운동계의 통합이 어려우니 이승만을 퇴진시키고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때 조완구는 이동녕, 신규식,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윤기섭]]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45명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첫째, 임시정부를 절대 유지할 것. >둘째, 대통령 이하 각 국무위원을 신임할 것. >셋째, 언론 행동 등 현 상황을 해칠 모든 행위를 방지하기에 노력할 것. 그러나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한 이래 독립운동의 노선을 두고 반발이 격화되자, 이승만은 1921년 5월 17일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상하이를 떠난다는 교서를 남기고 5월 29일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조완규는 이승만에게 재고할 것을 간곡히 권했지만 끝내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조완구는 1923년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폐지론이 대두되자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체택했지만,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등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들이 취임을 거부하거나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했다가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김구]]가 국무령을 맡을 무렵, 임시정부는 대다수 관원들이 다른 단체로 이탈하는 바람에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 몰렸다. 임시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타개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려했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유일당운동이었다. 조완구는 상하이에서 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결성한 상해촉성회를 기반으로 삼아 베이징, 광동, 무한, 난징 등에서 조직된 촉성회와 연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총석회연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1929년 좌익계열과 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일당의 조직방법론을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좌익 계열이 탈퇴했다. 이에 조완구는 임시정부를 지킬 정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1930년 1월 김구, [[송병조]], [[차이석]],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났고,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과 연합해 통일된 행동을 꾀했다. 이윽고 1935년,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단, 의열단, 미주한인독립당 등 5개 단체가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반대하자, 조완구는 1935년 11월 김구와 함께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한국국민당을 창립했으며 "독립운동에 관해 불순한 이론 및 행동은 반드시 배제한다"와 "임시정부가 발전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두 개 조항을 강령에 덧붙여 임시정부 폐지론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조완구는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뒤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국무위원을 새로 뽑는 일에 가담하여 송병조, 차이석, 이동녕, 김구, 조성환, 이시영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그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운영했다. 이어 임시정부가 개편될 때 내무장을 맡았으며, [[중일전쟁]] 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침략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 때 함께 따라갔다.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그해 5월에 재건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을 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시켰다. 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구가 선출되었고, 조완구는 조소앙, 홍진, 송병조, 지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국군으로 삼았고, 그해 10월 9일에 주석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을 단행했다. 주석에는 김구가 선임되었고, 외무부장엔 조소앙, 군무부장엔 조성환, 법무부장엔 박찬익, 재무부장엔 이시영이 선임되었다. 이때 조완구는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교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했고, [[김원봉]]을 위시로 한 조선의용대 잔여 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개헌을 통해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좌익진영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행정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이때 조완구는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기반 마련에 노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