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완구 (문단 편집) === 납북, 그리고 최후 ===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조완구는 김구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할 것을 주장했고, 효장공원 내 김구의 묘비문을 작성했다. 이후 그는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으로서 각종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암담한 현실에 절망하여 주변인들로부터 피난하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집에 머물렀다.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된 후, 그는 퇴계로의 풍전아파트로 이송된 뒤 9월 18일 경 북한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딸 조규은의 회고에 따르면, 조완구는 이송되던 날 "(조)소앙의 집으로 오란다."는 말을 남긴 채 인민군에게 붙들려 차량에 태워졌다고 한다. 이후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 초에 탈북한 뒤 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이자 정무원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이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구는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연로한 인사로 분류되어 자택 혹은 성북동과 성남호텔 등에 연금되어 감시하에 있다가 9월 18일 조소앙 댁에 끌려간 뒤 강제로 군복을 힙히고 차에 태워져 9월 27일 성북동, 삼선교 고개, 종로, 수색을 거쳐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공습을 받았고, 황해도 서흥에서 [[방응모]], [[김붕준]] 등이 숨졌다. 10월 12일 강계로 이송된 그는 이후에도 이동을 계속하다가 10월 18일 [[유동열]]이 숨을 거두는 걸 지켜봤고, 김규식 역시 12월 10일 만포 근처 군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걸 바라봐야 했다. 이렇듯 동지들이 하나 둘씩 숨을 거두자, 조완구는 정신이 피폐해졌고 1950년 11월부터 고열을 앓기 시작하더니 '제기열병'에 걸려 열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해 방문을 박차고 나가 눈밭에 눕는가 하면 헛소리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물을 찾다가 말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약을 처방해주고 돼지고기, 밀가루, 분유 등을 넉넉히 놓고 간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완구는 동료들과 함께 남한의 신문, 잡지, 중공의 신문, 서적, 잡지, 그리고 <이조실록>을 비롯한 고전, 고서들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조국전선 가입을 종용하고 성명서 발표, 대남방송 원고 작성, 가족 친지에게 편지 쓰기 등을 종용했지만, 조완구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1년 9월 중순, 납북 요인들은 북한의 소련과 중공 대사관을 방문해 각국 정부에 보내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호소문의 내용은 전쟁의 참상이 심하니 조속한 휴전을 원한다는 것이었고, 조완구는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호소문에 서명했다. 1952년 12월,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대거 숙청되었다. 이후 박헌영과 접촉했던 납북 요인들은 남로당의 죄상을 묻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고, 조완구, 조소앙, [[오화영]], [[원세훈]] 등은 이를 거부했다가 외출제한을 받았다. 이후 그들은 휴전이 성립된 뒤에도 여전히 억류되었고, 조완구는 1954년 10월 말 중병에 걸려 용성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병실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안우생을 불러 앉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생이, 과거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각되지? 지난 40여 년 동안 한 일들이 말이지.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또 누구의 칭찬이나 찬사를 받기 위해서 한 일도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이 자신의 결심에 따라 떨쳐나서 이국만리 대륙의 도시와 촌락을 헤매고 다니며 오직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행복을 찾겠다고 싸운 것인데...... 그것이 오늘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생각되는지 모르겠네.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가야하니 그럴까?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는 오늘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하니 그럴까? 오늘의 이런 현실을 보며 죽자고 40여 년을 싸웠는가 하고 생각하니 정말 허무하고 마음 아프기만 하고, 서글프기만 하오. 1954년 10월 27일 오후 8시, 조소앙, 안재홍, 오화영, [[윤기섭]],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 홍명희가 그의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조완구는 눈을 감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소앙, 일파([[엄항섭]]), 춘곡(원세훈), 민세(안재홍)...... 나는 가네. 당의 간판을 못 보고 가서 한이네. 통일.... 통일..... 먼저 가네. 먼저 가..... 그리고는 숨을 멈추니, 향년 73세였다.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매장되었다. 조완구는 납북 후 "월북 인사"로 간주되어 대한민국 내에서 규탄 대상으로 낙인찍혔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조규은 여사는 당국으로부터 심한 감시를 받고 가난 속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89년 아버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으면서 비로소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1993년에 아버지의 삶을 다룬 <고독한 승리>를 출간했다. 조규은 여사는 2004년 9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