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용원(배우) (문단 편집) === 일본 유학과 이후 === 1990년 4월 일본 와세다대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찍이 연예계 생활을 시작해 공부와 병행하며 정신없이 이십대 초반을 달려온 조용원은 졸업 즈음에야 자신의 내면, 연기 등을 더 채우고 싶다는 뜻으로 일본 유학을 결정하게 된다. 유명세를 떠나 외국에서 고학하며 지내던 초기 1,2년간은 스스로가 정말 영화 주인공인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경향신문의 1996년 9월 1일 자의 내용에 따르면, 80년대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전에도 학점을 상위권으로 유지하면서 드라마와 당시 유행했던 예능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MC로 활동하는 동시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하루에 수면시간이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일어 한자사전을 하루 분량을 정해서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유학 직후에 환율이 폭등해서 금전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허름한 집에서 아르바이트 생활도 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 있는 모친은 관절염으로 투병을 시작하여 마음 고생도 심했다고. 1991년 일밤 이경규의 몰래 카메라에 출연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진행한 프로그램인 '밤과 음악사이에'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후 대학원을 무려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인 동기들을 제치고 과탑을 찍으며 조기졸업을 하였다고 한다. 도쿄대 박사과정 진학 후 논문 준비를 할 1995년 즈음 완전 귀국하게 된다. 주제가 영화였고 한국에서 써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에서 였다고. [youtube(c7-Lc3jZYrg)] [youtube(nMU9z-k84As)] [[파일:attachment/jyw-jp.jpg|width=600]] [[일본]] 유학 당시 사진. 그리고 일본에서의 유학을 바탕으로 오겡끼데스까 같은 일본어 교재 등 여러 책을 써 내기도 했다. 배우 [[변우민]]이 조용원과 만난 썰을 풀었었다. [[변우민]]은 조용원씨와 같은 85학번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유명세 또한 굉장한 조용원씨에게 감히 말도 걸지 못했고 접촉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원이 부산에 있는 영화 [[땡볕(영화)|땡볕]]상영관을 비즈니스 상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조용원이 변우민에게 전화를 걸어서 난데없이 너가 85학번의 유일한 부산사람이니 부산구경 좀 시켜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둘이서 부산을 구경하던 도중 갑자기 조용원이 자신의 고민과 슬픔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용원이 너무 일찍 연예계에 데뷔하게 돼서 힘들어 죽고싶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우민]]은 그녀를 말리려고 [[거짓말]]로 6개월 시한부라고 --[[구라]]를 쳐-- 죽으면 안된다고 하고 자신은 거짓말을 맞추려 멀쩡한 몸으로 학교를 휴학했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 그것도 무려 2학기씩이나 휴학을 했다. --[[변우민]]씨 당신은 도대체...-- 물론 이건 양념이 많이 쳐저있는 얘기고 변우민도 인기스타였기에 연기활동 때문에 휴학했을 것이다. [[파일:external/news.donga.com/28923532.2.jpg]] 다만 아주 은퇴한 건 아니라서 일본 유학 후에도 1996년까지 영화나 [[드라마]]에 간간히 출연했으며 [[1997년]] [[뮤지컬]] 제작자로 전향했지만 실패했다. 그 외에 1988년 후반과 1989년 초반에는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여자 [[MC]]를 잠시 맡기도 했다. 일명 토토즐은 1985년에 첫 방송해서 [[1997년]] 폐지된 인기 버라이어티이자 오락 프로그램으로 [[1991년]]까지 남자 MC를 맡았던 [[이덕화]]의 '''부탁해요~'''로 유명하다. [youtube(oktkiphVLZ8)] 1990년대 중후반에는 [[EBS]]의 영화정보 프로그램인 [[시네마 천국(EBS)|시네마 천국]]의 진행을 수년간 맡기도 했다. 카메라를 똑바로 처다보면서 특유의 프랑스어틱한(...) 발음으로 영화 해설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참으로.... 동시에 기존에 살던 집을 팔고, 연극단 '원'을 창설하여 [[변우민]]씨와 함께 백일천사(101 1004)라는 연극과 다른 여러 연극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1998년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 관객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패했다. 이후에는 씨네버스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씨네버스 운영당시의 인터뷰내용을 참고하면 굉장히 열심히 씨네버스를 경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하게 된다. "결재서류와 이력서들을 검토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보니 자연히 밥을 제때 챙겨먹는 것도 어렵다. 지난 달에는 위궤양 때문에 며칠 심하게 고생하기도 했어요." -매일경제 2000년 6월 2일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