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용준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파일:external/img.khan.co.kr/20100122001056_r.jpg|width=100%]] || 연세대를 졸업하고 2002년 계약금 5억 4000만원을 받고[* 현대 유니콘스 투타 통틀어 신인 계약금 중 최다액. 2위가 그 [[박재홍(야구)|박재홍]](4억 3000만원). 당시 현대 구단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용준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준 것[* 이 때 [[강귀태]], [[김민우(1979)|김민우]], [[이대환]], [[조재호]], [[배힘찬]] 등이 입단을 했는데 조재호를 빼면 나머지 모두 2억 이상 받고 입단한 선수들이였다.]은 그만큼 조용준에 대한 기대치가 컸다는 거다.][* 이 때 고교 동기 [[강철민]] 역시 한양대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98아시안게임 멤버이기도 하다.) [[KIA 타이거즈]]에 입단해 비슷한 계약금(5억)을 받았다. 강철민이 먼저 KIA와 5억원에 계약했기 때문에 조용준이 더 높은 계약금을 부를 수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여 허리 부상을 당한 [[위재영]][* 실제로 2000년~2001년 2시즌간 마무리를 뛰었다. 본인이 블론 세이브 할 때마다 너무 멘붕이 오고 머리도 아프고 고통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상까지 겹쳤기에 2002년부터 선발로 다시 되돌아갔다.]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원래는 위재영 대신 전년도 팀내 투수고과율 1위인 [[신철인]][* 2001년 96이닝을 던지며 13세이브를 올렸다.]과 베라스라는 용병과 더블스토퍼 체제여서 7회부터 8회 2이닝만 던지고 9회에 마운드를 인계하는 역할이었지만 베라스가 불과 10경기도 안되어 박살이나고 신철인은 전년도 혹사로 추격조로 편입이 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9회까지 던져 마무리 보직을 맡았다. 최종적으로 구원 포인트 1위[* 순수 세이브로는 두산의 [[진필중]]이 1위였다. 세이브는 31개]에 오르며 [[KIA 타이거즈]]의 [[김진우(1983)|김진우]]를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조용준은 대졸이고 김진우는 고졸이라 프리미엄이 있고 고졸 신인 첫 탈삼진왕을 거머쥔 김진우의 신인왕 수상이 유력했으나 김진우가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전의 2이닝 2실점,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 이어서 [[조용준]]이 등판했다가 호투를 한 것도 가산점을 받은 원인이다. 김진우의 부진을 본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소속팀 감독인 [[김성한]]은 이를 태업으로 의심하고 김진우에게 쌍욕을 했다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받았다. 이 해 기록은 60경기 출장에 109이닝 116탈삼진 1.90의 [[평균자책점]]과 28세이브 4홀드.[[https://www.youtube.com/watch?v=ydKjI5bBJlU|신인시절 세이브 영상]] 결과론적으로 이 때의 기용이 조용준의 야구인생을 망치게 된다. 아마 때부터 혹사당한 투수를 신중히 관리했어야 하는데 오자마자 불펜으로 마구잡이로 굴리는 바람에 나중에 크게 탈이 나게 된다.[* 역대 신인 중 단일시즌 구원 포인트가 가장 많은 건 조용준.] 물론 현대는 막 입단한 조용준을 담금질 없이 1군에서 바로 기용할 정도로 신뢰하고 특급 유망주로서 대우를 했다. 하지만, 등판 간격이나 투구수 관리 등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 이후 2003년에는 약간의 [[소포모어 징크스]]인지 잠시 주춤했으나[* 전년도 이닝 수를 보면 혹사에 가깝다. 2002 시즌 당시 [[김시진]] 투수코치는 [[권준헌]], [[이상열(야구)|이상열]], [[신철인]], [[마일영]], [[송신영]]을 제외하면 던질 만한 투수가 없어서 마무리 투수인 조용준을 8회에 집어넣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도 신철인과 송신영은 4점대 자책점, 이상열도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할 정도로 썩 좋지 않아서... 그냥 유니콘스 선수들 방어율이 처참했다. 1선발 김수경만 봐도 방어율이 5점대에 근접했고, 임선동은 말 그대로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이듬 해에는 마치 [[페드로 마르티네즈]]을 연상시키는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하여[* 특히 좌타자에게는 거의 [[마구]] 수준이었다고] 63경기 75이닝 10승 3패 34세이브 방어율 2.28의 좋은 성적을 기록,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으며 팀의 4번째 우승에 공헌하였다. 특히 이 해 정규시즌과 [[200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동안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맞은 홈런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인상적. ||[[파일:1594308237.gif|width=100%]] || || [[파일:1594547883.gif|width=100%]] || || {{{#fab93d '''현대 유니콘스의 V4를 확정짓는 조용준'''}}} || [[삼성 라이온즈]]와의 [[2004년 한국시리즈]] [[2004년 한국시리즈/9차전|9차전]]에서는 빗발치는 폭우 속에서 승리를 지켜냈는데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역대 한국시리즈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해 한국시리즈 성적은 7경기 12⅓이닝 2실점 비자책 3세이브 평균자책점 0. 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아직도 조용준 하면 2004년 한국시리즈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오승환]]과 [[진필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무리한 투구폼[* 조용준은 우선 투수치고는 하드웨어가 작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관리했던 투수코치 김시진이나 고교시절 은사였던 [[장호연]]도 보자마자 선발투수로는 롱런은 힘들고 평범한 중간계투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 이를 극복하려고 [[팀 린스컴|투구폼을 굉장히 크고 역동적으로 가져갔는데, 그만 몸에 무리를 심하게 준 것]].]과 직구가 아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포크볼 위주로 피칭한 것, 어찌보면 대학시절 ~ 프로 데뷔 첫 시즌 시절은 그야말로 진필중이나 [[임창용]]을 보일 듯한 [[중무리 투수]]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있었던 [[혹사]]의 피로누적과 [[자기관리]] 실패까지 겹친 탓인지 2005년에는 부진했다.[* 일반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용준의 자기관리 소홀은 [[노장진]], [[임선동]], [[김진웅]], 프로 동기 고졸 [[김진우(1983)|김진우]]와 함께 야구계에서 꽤나 유명했다. 안 그래도 김진우랑 연관되어 있는 것부터가...데뷔년도도 2002년으로 같고 서로 신인왕 경쟁도 하였고 서로 방황하다가 복귀한 것까지 보면 참...[* 그래도 김진우는 복귀 후 2012년에 규정이닝을 채우고 2점대 방어율에 10승까지 거뒀다. 하지만, 2018년 재기에 실패하여 현재, 2019년 호주에 있는 야구 리그인 [[질롱 코리아]]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가, 하계에는 [[멕시코]] 야구리그인 술타네스 데 몬테레이에서 야구를 했다. 이후 기아자동차와 해당 팀의 제휴가 끝나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술타네스 데 몬테레이는 과거 KBO 리그에 뛰던 많은 용병들이 잠시 거쳐 가던 곳이었다. [[찰스 스미스]]나 [[카림 가르시아]] 등등이 있다.] [[김시진]] 감독에 의하면 급작스럽게 [[유명인|스타 플레이어]]가 되면서 [[자만]]에 빠졌던 게 문제라고 한다.] 이 해에는 구원 등판만 하면 이상하게 불을 잘 질러 조라이터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그래도 [[삼나쌩 클럽|삼성 타자들에게만은]] 강했다. 아니, 통산 성적으로도 [[미키 캘러웨이]] 수준의 [[삼나쌩]][* 현대에서 역대 삼성전 가장 강했던 투수들은 '''[[정명원]]'''[* 특히 그 [[재계 라이벌 시리즈]]로 유명한 '''[[벤치 클리어링]]'''을 만들었다], '''[[정민태]]'''...]이었다고... 그래서 당시의 삼성팬들은 선발투수로 미키 캘러웨이가 나오면 처음부터 안봤고[* 3시즌 통산 선발로 나와 8승 무패 방어율 0], 다른 경기도 잘 보다가도 조용준이 올라오면 채널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기도 한다.[* 아마도 [[2004년 한국시리즈]]의 여파가 컸을 것이다.] 오승환이 나올 때 타 팀 팬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삼성팬들에게 투영시킨 선수가 조용준이었다. 2005년 부진의 원인은 어깨 부상이었고, 구단에서는 이미 감독부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같은 말이나 하는 상황이 되자, 아예 조용준을 8월부터 전력에서 제외한다. 입단 직후부터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던졌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9월에 수술 일정을 잡고, 2006년 전반기까지 재활을 하다가 2006년 후반기부터 복귀시켜 다시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는 전략이었다. 다만, 조용준의 시즌 아웃 직전에 삼성 라이온즈와 대구 3연전이 있었는데 3연투를 하고 3세이브를 거두고 시즌 아웃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성적이 2004년 대비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이나, 탈삼진은 풀시즌을 안 뛰었음에도 더 늘어났다. 게다가 세이브도 27세이브를 거두었기 때문에 풀시즌을 뛰었더라면 30세이브는 거뜬했을 것이다. 그 후 2006시즌부터는 아예 1군에서 빠지며 2년 동안 단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한 채 2군에서 재활에 몰두하게 된다. [[현대 유니콘스|구단]]에서는 그의 [[자기관리]] 소홀을 우려하여 대선배인 [[정민태]]와 함께 수술시키고 재활 프로그램을 짜줬으나, 일설에 따르면 은퇴가 임박한 노익장 소리듣는 정민태보다도 재활 훈련에 소홀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정민태는 2006년 10월에서라도 복귀하지만(1경기 등판), 조용준은 2007년이 다 지나가도록 복귀하지 못한다.][* 다만 정민태는 복귀에 너무 서두른 나머지 2007년 승리 없이 7패 평균자책점 12.81을 기록하며 완전히 '''[[먹튀]]'''가 되어버린다. 먼저 복귀한 정민태가 제대로 망하면서 이를 구단에서 반면교사로 삼으며 조용준이 비교적 수월하게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술을 받고 6개월 만인 2006년 3월부터 2군 경기에 투입한 것도 있다고 한다.[* 저렇게 되면 [[이동현(1983)|이동현]] 이나 [[한기주]] 처럼 재활기간이 길어 질 수 있다.] 당시 재활군에서 조용준의 구속은 140km을 찍었다. 결과적으로 조용준을 구단에서 계속해서 1군 복귀를 시키려다가 선수 본인이 계속해서 거부하자, 벌금을 부여받았고 억울해했다는 후문. 심지어 조용준이 받은 수술은 어깨 슬랩 수술로 회복도 어려운 수술이었다. 조용준은 전체적으로 자기 몸을 좀 소홀히 여겼다.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어깨수술을 받았는데, 제대로 재활이 되지 않았고, 결국 프로 입단 후 다시 수술을 받으라는 진단이 나왔으나 그걸 무시하고 4년을 더 던진 것이었다.[* 이미 프로 입단 전부터 현대에서 조용준의 저런 몸상태를 알고도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것이었다.][* 프로 입단 후 수술 받으라는 소견이었던 부상은 바로 Slap. 즉 어깨관절와순 파열 부상이었다. 이 부상은 수술 후 재활에서 복귀한 케이스가 MLB까지 통틀어도 [[류현진/선수 경력/2015년|극히 드물다]]. 따라서 구단에서도 재활과 출전 병행을 권유했으며, 본인도 이에 응한 것이다. 근데 약속과 다르게 이닝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은 구단의 실책이라고 봐야 한다. 먼저 문제는 마무리 투수를 용병에게 맡긴 것이 패착이라고 본다. 이후는 감독과 투수코치의 문제와 선수 본인의 문제.] 2007년 현대의 마지막 시즌에 그는 그 자리에 없었고 2008년에는 아예 연봉 미계약자로 남아 [[우리 히어로즈|히어로즈]][* 2019년 지금은 [[키움 히어로즈]]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담배]]에서 스폰서 공급을 하는 [[우리 히어로즈]]였'''었'''다.]의 창단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동안 조용준의 거취에 대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2008년 말에는 [[가짜 뉴스|은퇴설, 잠적설]] 등 온갖 루머까지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히어로즈와의 연봉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뉴스만 나오다가 결국은 연봉 8천만원에 팀에 복귀한다.[* 당시에도 히어로즈는 그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했는데 시즌 후 60%의 선수들이 타팀으로 떠나거나 새롭게 계약을 했다. 다만 그 동안 보류수당 문제가 꼬이면서 실제로 조용준이 수령한 금액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에 가까웠다.][* 조용준 본인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터무니 없는 수준의 삭감율(김동수와 전준호는 70% 이상 연봉이 삭감되어 1억 미만으로 재계약을 했다. 심지어 송지만과 김수경은 해체 후 재창단이었기 때문에 FA 계약도 사라졌다.)을 보고 선수협 현대 유니콘스 대표였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도의적 책임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가장 늦게 계약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노준]] 단장이 아예 언론플레이를 통해 조용준을 이런 식으로 밀고 갔다고.] 이후 2009년 8월 16일 마침내 1군에 모습을 드러냈고 9월 10일에는 무려 1,455일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9:8로 이기고 있던 9회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김태균]]에게 안타를 허용한 후 다음 타자 [[이도형]]에게 끝내기포를 얻어맞고 전대미문의 '''[[불쇼|역전패]]'''의 마지막[* 이날 서울 히어로즈는 9:0으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무려 11점을 내주고 역전패했다. 당시 '''9점차 역전승'''은 [[한국프로야구]] 기록이었다. 2013년 5월 8일 [[SK 와이번스]]가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10점차를 뒤집는 승리를 거두면서 기록을 경신했다.]을 장식하며 [[정민철]]의 은퇴식[* 이날 팬들과 정민철은 은퇴식 중에 [[전미가 울었다|눈물]]을 보였다.]을 더더욱 성대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 경기는 조용준의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 날은 같이 몸을 풀던 [[송신영]]이 올라가겠거니 싶었는데 투수코치가 조용준의 등판을 지시했다고. 이 날의 역전 쓰리런 홈런을 맞은 이후로 코칭스태프가 잔여시즌에 올리지 않았다.] 이후 [[김시진]] 감독이 2010년에는 마무리로 기용해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시즌 직전에 [[신종플루]]에 걸려 훈련이 힘들어진 데다가 어깨 통증까지 재발하면서 스프링캠프 도중 '''[[신철인]]'''과 함께 조기 귀국했다.[* 이때 야갤에서 김시진 감독 담배 타임이 더 늘어난다는 개드립이 있었다.] 마무리 보직은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갓 제대한 '''[[손승락]]'''에게 넘어갔으며, [[손승락]]은 그 해 세이브왕을 차지한다. 이후 2010년 시즌 내내 강진 2군에서 재활만 하다가 2010년 10월 8일 자로 [[신철인]]과 함께 [[넥센 히어로즈|구단]]에서 방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6월부터 아예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향후 복귀가 어려워진 만큼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cateid=1028&newsid=20101008113204100&p=poctan&RIGHT_SPORTS=R2|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신철인, 조용훈 둘 다 30대 초~중반으로 아직은 더 활약할 수 있던 나이였지만 아쉬운 부분. 다만 본인은 현역 연장의 의지를 보였고, 다른 팀에서라도 새출발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택 근처에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 자기관리 문제 등이 겹치면서 2010년 이후 어떤 팀에도 둥지를 틀지 못했고,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당시 나이가 32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는데, 이 무렵 동기라고 할 수 있던 선수들이 현역으로 많이 뛰었던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쉽다.[* 과거 [[현대 유니콘스|현대]] 시절 팀 선배인 [[송신영]]이나 [[박승민|박준수]]보다도 더 일찍 은퇴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수경(야구)|김수경]]'''이 좀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를 했었다가 번복한 것이 2013년. 김수경은 2014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서 새롭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 완전 은퇴를 선택했다.] 조용준 본인은 오랜 재활로 인해 야구에 대한 열정도 어느 정도 떨어진 상황이었고, 아예 야구계를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고 한다. 통산 116세이브로, 제대로 마무리로 뛴 시즌이 불과 4시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관리가 조금만 더 잘 됐다면 '''[[오승환]]'''[* 조용준이 세운 최소경기 100세이브(197경기)를 돌파한(180경기) '''유일한''' 선수]과 더불어 KBO를 대표하는 양대 마무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야만없]]. 그리고 조용준이 은퇴한 뒤, 그 오승환은 201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했다 KBO에 복귀했고, 2023년 현재, KBO 통산 세이브 1위는 [[오승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