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해 (문단 편집) == 생애 == [[1925년]] [[8월 5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대구금융조합연합회장을 지낸 아버지 조범석(趙範錫)과 어머니 [[재령 이씨]] 이규정(李圭廷)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경북고 26회 졸업생이다.]하고, 1950년 대구의과대학(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대구의과대학은 1951년 10월 [[경북대학교]]로 개편 됨에 따라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대학 재학 중에 삼성그룹 창업회장인 [[경주 이씨]] [[이병철]](李秉喆)의 장녀 [[이인희]](李仁熙) 한솔그룹 고문이랑 결혼을 하였다. 즉, 그는 [[이병철]] 회장의 맏사위가 되는 셈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1년 선배였던 [[박준규(1925)|박준규]] 국회의원의 중매로 선을 보게 되어서[* 박준규는 이병철의 처조카이기도 하다. 이병철의 부인 박두을은 박준규의 당고모였으며, 박준규의 부친은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이병철이 대구에서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결혼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조동혁(趙東赫, 한솔그룹 명예회장), 조동만(趙東晩,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조동길(趙東吉, 한솔그룹 회장.), 조옥형, 조자형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으로 5년 간 군생활을 보냈다. 전역한 뒤에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소아과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유학은 순탄지만은 않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국민감정이 썩 좋지 않아서 한국인 유학생에 대해서 멸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내에서 의대를 다닐 때에는 예과과정이 없어서[* 조운해 이사장이 의대를 다니던 시절에는 예과,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의사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치르는 국가고시도 없어서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증이 주어졌다고 한다.] 기초학문 이해에 대한 부족함이 있었고, 오랜 군 생활로 학문으로서의 의학을 접한지 오래되어서 중도에 유학을 포기할 충동이 여러 번 있었다고 회고했다.[[http://www.knupresscente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84|인터뷰 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영어에 미숙한 일본인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운해 이사장은 군 생활 중에 미군들과 접촉을 많이해 영어 회화에 자신이 있었는데, 외국인 강의나 레포트 작성 시에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어 자신감을 갖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1960년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한 뒤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66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병원 경영자의 길을 걸었다. 고려병원은 오늘날 강북삼성병원, 삼성의료원의 전신이 된다. 고려병원 이사장, 대한병원협회 회장, 아시아병원연맹 회장를 지냈고,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국제병원연맹 운영이사를 역임하였다. 1987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받았다. [[2019년]] [[1월 30일]] 아내 [[이인희]][*생몰 1929년~2019년(향년 90세)]를 떠나보내고 얼마지나지 않은 3월 1일에 노환으로 운명을 달리 하였다.[[http://naver.me/GHExTBZq|#]] 향년 94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