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위정통론 (문단 편집) === 북조 === 우선 북조의 상황을 보자. 서진은 중국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단연 최악의 국가였다.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고 암군들이 연이어 등장했으며, 종친들에게 지나친 권한을 부여한 주제에 중앙정부가 그걸 통제할 생각은 커녕 권력 싸움에 이용해 [[팔왕의 난]]이 발발하는 등 후한 말부터 백성들에게 힘겨웠던 나라 꼴은 완전히 개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런 총체적 난국 상황에 결국 서진은 외적을 방어할 군사적인 역량마저 모조리 상실하고야 만다.[* 이 원인은 앞에서 말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은 왕족들에게 지나친 권한을 부여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방군 통제권이었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서진 황실이 병권은 확실히 쥐었지만 문제는 '''그걸 가진 황족들끼리 쌈박질'''을 한 것이다. 황족들은 당연히 자기가 지휘할 수 있는 지방군 동원해서 싸웠고 그 결과 각 지방에서의 서진군이 싹 날아갔다. 이러니 이민족들이 쳐들어와도 손도 못 쓰고 당할 수 밖에…….] 문제는 후한 말엽부터 조위-서진을 거쳐 중국으로 이주 혹은 잡혀온 수많은 이민족들이 이들 체제 하에서 하층민 내지는 한족에게 멸시당하는 처지[* 이것은 이민족들을 당대 기준으로 무작정 억압하기보다는 되도록이면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과 연계하여 적당히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고, 회유하면서 제어하려고 한 촉한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이런 이유로 촉한은 그래도 현지 이민족들이 우호적으로 생각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촉한 망하고 겨우 30~40여 년 뒤 건국된 성한은 저족 출신의 이특의 아들인 이웅이 세웠는데 촉한을 꽤나 신경써줬다). 이런 정책은 이 시대 기준으로 대단히 파격적인 것으로 사실 조위-서진 정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촉한이 특별했던 것이다. 이민족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중국의 통일 왕조는 당나라 때부터다.][* 단적인 예시로 흉노족의 경우 환·령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에 복속되긴 했지만 흉노만의 선우가 존재하고 또 실질적으로 존재했지만 조조는 남흉노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흉노를 분열시켰다.]에 있는 준노예 상태였기에[* 당장 후조의 건국황제라고 할 수 있는 [[석륵]]부터가 이민족 노예 출신이다.] 서진 체제를 매우 증오하고 있었고 [[독발수기능]]의 난 등 국초부터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만이 가득했던 이민족들이 팔왕의 난으로 인해 한족들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들고 일어나 결국 [[오호]]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는 사태가 바로 [[영가의 난]]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기록들을 보면 조위-서진으로부터 억압받아온 이민족들은 이들 왕조들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낙양이나 장안 등 서진의 옛 중심부를 장악한 이민족들은 과거 자신들을 억압한 서진의 도읍 낙양을 철저히 파괴하고 서진의 황릉을 도굴했으며 지배층인 황족들이나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능욕하고 노예로 삼았다. 예를 들어 서진의 태위 [[왕연]]은 낙양에서 서진의 왕족들과 고위급 관리들을 데리고 도주하다가 석륵에게 붙잡혔는데, 석륵이 왕연에게 당신들의 진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폭망했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왕연은 [[팔왕의 난|황실의 내분이 일어나서 그랬다]]며 서진이 실패한 이유를 전적으로 자신이 봉직한 사마씨 황실에다가만 전가하고 신하인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자신은 원래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나 세상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서 석륵에게 황위에 오르라고 권유하며 자신도 그에 협조하겠다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자 석륵이 왕연에게 당신은 젊어서 서진 조정에 출사해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 아니냐면서 그런데도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냐며 힐책했다. 또 천하를 망친 것이 당신 같은 서진의 고위 관료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 실제로 서진은 황실만 문제였던 게 아니라 고위층들도 [[청담사상]]에 빠져 나랏일은 나 몰라라였고 왕연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면서 왕연과 그를 따르던 서진의 왕족들과 고위급 신하들을 모조리 죽였다. 또 전조의 유총은 [[사마치]]를 사로잡고 그에게 푸른 옷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관리들에게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푸른 옷은 평민이나 노비들이 입는 옷이었는데 이때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서진의 신하들이 통곡하자 그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사마치도 죽인다. 이민족들 입장에선 과거 서진의 지배층들은 그야말로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진, 그리고 그 전신인 조위가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일각에서 주장되는 바와 같이 후대에 촉한정통론이 성행한 이유가 조위와 서진이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 인해 후대에 확산되었다는 설 자체는 분명 확대 해석이다. 후술하겠지만 후대의 촉한정통론은 후대 민중들의 촉한에 대한 지지와 유교적 대의명분론, 정치적인 면이 결합된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민족 왕조들이 조위와 서진을 부정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로 이 때문에 조위정통론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서진을 무너뜨린 [[전조]]의 초대 황제 [[유연]]은 비록 흉노족 출신이지만 서진에 대항하고 한족 인민들의 통치하기 위해 스스로를 한나라 유씨의 뒤를 이었다는 명분을 들고 일어났으며 그 전까지의 한나라 황제들을 높이고 촉한의 개창자 유비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바쳐 전한의 개창자 한고제, 후한의 개창자 광무제와 동열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을 촉한이 아니라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보아 효회황제라는 시호를 올린다. 즉 흉노족인 유연은 조위가 아닌 [[촉한정통론|촉한을 후한의 계승자로 본 것]]이다. 그리고 전조의 뒤를 이은 후조의 황제 갈족 출신의 석륵은 서진의 병폐와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겪은 밑바닥 노예 출신인터라 당연히 조위-서진에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칭송하는 신하들을 앞에 두고 한나라의 시조 한고제와 후한의 개창제 [[광무제]]를 추켜세워주면서 자신은 광무제와 동급 정도는 될지 모르겠지만 한고제와 같은 위대한 인물만은 못하다고 자평하면서 조위와 서진의 창업자인 조조와 사마의 따위는 이런 영웅들에게 절대 비할 수 없다며 그들을 단순히 간악한 방식으로 천하를 강탈한 역적에 불과하다고 대놓고 평가절하해 버렸다. 또한 사천의 저족 출신의 이특이 세운 [[성한]] 역시 스스로 한나라로 국호를 바꿔 자신들이 촉한의 계승 황조임을 자칭했다. 나라 이름을 바꾸기 전에도 촉한 출신의 범장생을 승상으로 등용하고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세우는 등 촉한의 민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화북을 통일했던 저족계 [[전진]]의 명군 [[부견]]과 그의 명재상 한족 출신 [[왕맹]]의 관계를 두고 당대에 이미 촉한의 개창자 유비와 명재상 제갈량과 같은 이상적인 군신 관계라고 평가가 정립됐던 걸 보면 당대 화북을 장악했던 이민족들의 인식에서 조위-서진 정권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들의 인심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조위에게 조공을 바쳤단 명분하에 [[북위]][* 북위의 지배층은 [[탁발선비]]족인데 이들은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을뿐더러 서진으로부터 '대'라는 나라 이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애초 나라 이름이 북'''위'''이다.]처럼 조위의 계승성 및 조위정통성을 떠받든 북조 황조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후한-조위-서진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을 대놓고 거부하거나 비웃는 이런 이민족 리더들의 반응을 보면 조위정통론이 서진의 멸망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