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이(로마) (문단 편집) == 생애 == 세 자매 중 가장 아름다워 구혼자가 줄을 설 정도였지만, 조카딸이 결혼할 경우 조카사위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여긴 숙부 [[바실리오스 2세]]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다. 23세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3세]]와의 혼담이 성사되어 성대한 결혼식 행렬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는데 신랑이 식을 올리기는 커녕 얼굴도 보기 전에 요절하는 바람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50세가 되도록 처녀로 지냈다. 1028년, 아들이 없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8세의 임종이 가까워 오자 조이는 차기 황제로 세울 남편감을 찾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8세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조이의 남편이 황제가 되고 조이는 황후가 된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전대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일리아 풀케리아]]와 [[레오 왕조]]의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 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 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번째 남편이 [[로마노스 3세]][*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의 딸의 아들의 아들이 [[콘스탄티노스 8세]]였고, 또다른 딸이 아르이로스 가로 시집가서 낳은 아들의 아들이 [[로마노스 3세]]라 6촌간이다. 즉 조이와 테오도라 자매에게는 7촌 아저씨. 원래 결혼 예정에 있었지만 친척이라 로마노스 3세가 고사했으나, 부황 콘스탄티노스가 죽음 목전에 그를 결혼하라고 ~~강제~~ 지명했다.]이다. 조이는 로마노스 3세와 결혼한 뒤 자식을 보길 바랐지만[* 임신을 위해 온갖 약물과 부적, 주술까지 동원했다고 하지만 요즘도 50대가 임신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인데 당시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로마노스 3세는 안그래도 조강지처와 강제로 이혼당하고 조이와 결혼한 마당에다가 새 아내는 이미 50세가 넘었으니 조이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로마노스 3세는 조이와의 동침을 거절하고 각방을 썼으며, 조이의 지출을 제한한데다 나중엔 젊은 정부까지 들이게 된다. 그러던 중 조이는 환관장의 소개로 환관장의 동생인 젊은 미남 미하일을 총애하게 되었고, 시름시름 앓던 로마노스 3세가 목욕탕에서 의문사한 날 곧바로 미하일과 재혼하여 [[미하일 4세]]로 즉위시켰다. 미하일 4세는 [[명군]]이 될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었다. 미하일 4세가 죽자 조이와 미하일 4세의 양자 [[미하일 5세]][* 미하일 4세의 누나의 아들이었다.]가 즉위했다. 그러나 양아들 미하일 5세는 황제로 즉위한 후 양어머니인 조이를 박해하고 추방하여[*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 92쪽에는 'had her tonsured', 즉 남자 성직자처럼 대머리 일부가 보이게끔 삭발시켰다고 한다.] 반발을 사 몇달 후 시민군의 반란에 의해 폐위되었다.[* 당시 [[바랑기안 가드]]로 복무 중이던 노르웨이의 [[하랄 3세]]는 이때 자기가 직접 미하일 5세의 눈을 뽑아 죽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시민군에 의해 조이는 여동생 [[테오도라(11세기)|테오도라]]와 공동 여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를 싫어한 조이는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9세]]와 재혼해 그를 새 황제로 삼고 자신은 테오도라와 같이 황제에서 물러나 다시 황후가 되었다. 세번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는 정실부인이자 계승권자이며 [[포르피로게니투스|포르피로옌니티]]인 조이를 멀리하고 젊은 애인인 마리아 스클레리나(Maria Sklrarina)를 가까이하다가 1044년 축일 행진 중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는 문제가 있었다. 조이는 1050년에 72세로 죽었다. 정리하자면 조이는 1028년~1042년 동안 황후 또는 모후로서 첫번째 남편([[로마노스 3세]]), 두번째 남편([[미하일 4세]]), 양아들([[미하일 5세]])을 차례대로 황제로 삼았고, 1042년에 두달 간 여동생([[테오도라(11세기)|테오도라]])과 공동 여황제였다가, 다시 황후가 되어 세번째 남편([[콘스탄티노스 9세]])을 황제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