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정래 (문단 편집) == 생애 == [[1943년]] [[8월 17일]] 선암사에서 아버지 조종현과 어머니 박성순의 4남 4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당시 일제는 불교황국화 정책에 따라 승려들의 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덧붙여 선암사는 현대에도 대처승 제도를 인정하는 [[태고종]]의 종찰이다. 아버지 조종현은 선암사 부주지 출신의 승려로 본명은 조용제로, 종현은 법명이다.호는 철운이다. 해방 후 절 사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하자고 주장했다가 사형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부친에 대한 이미지와 일화는 소설 [[태백산맥(조정래)|태백산맥]]의 법일스님으로 구현된다. 이 일로 인해 결국 조종현은 [[환속]]해서 고등학교 국어교사 및 시조시인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 별세했다.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청년회에 가담해 활동했고 불교 학생 사상기관지인 ‘회광(回光)’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1929년에 '조선일보'에 동요를. 1930년 '동아일보'에 시조를 발표하며 시조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어렸을 때 조정래 작가는 아버지인 조종현을 따라다니며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시조를 읊게 되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조금씩 시에 대한 매력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시조에 대해 배울 때에는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다 아는 내용이었다고. 청년 시절엔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스님이 될 뻔했다고 한다. 1948년 순천에서 여순반란사건을 겪고, 1950년 충남 논산에서 6.25를 맞는데, 이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지배하고, 그의 작가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3년 작은 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벌교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생생한 기억들이 훗날 태백산맥을 써내려가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재가 있어, 이 무렵 최초의 자작문집을 만들었고 글짓기에서 전교 1등상을 받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생활 시간에 일제 시대를 배우다가 안중근, 유관순, 청산리대첩밖에 없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무엇을 했길래 책에 이것밖에 안 나오냐고" 질문했더니, 당시 선생님은 "건방진 놈, 담에 크면 알게 된다"고 말했다고 작가가 회고한다. 이후 광주에서 [[광주서중학교]][* 6년제 광주서중이었다가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로 분리됐고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광주서중은 폐교됐다. 광주-전남 지역의 엘리트들이 모인 중-고교였다.] 3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뒤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광주를 방문한다. 이 때의 광주는 흡사 죽은 도시 같았다고 한다. 심지어 건물에 들어가자 벽 곳곳에 들러붙은 핏자국과 머리카락 등이 보였다고.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아버지가 전근한 서울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학교]](52회)에 입학하였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62학번으로, 성우 [[김종성]]과 동기.]를 졸업했다. 보성고등학교 시절, 1학년 체력검사에서 2천 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등산반에 특별 스카우트 되기도. 그런 인연으로 오랫동안 등산을 즐겼다. 놀랍게도 보성고 3학년 때는 역도반에 들어 활동했는데 당시 아버지가 보성고 문예반 교사였기에 일부러 운동반으로 배돌았다고 한다. 당시 턱걸이를 60번쯤 할 정도로 강건한 체력이었는데, 어쩌면 그때의 단단한 체력으로 현재까지 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본래 동국대 국문과를 지망할 당시 조정래 작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국어교사로 일하였으며 교사 재직 중 등단하여 여러 편의 소설 작품을 내놓았다. 1973년에 '월간문학' 편집장, 1976년 '소설문예' 발행인이 되었고 1978년 '민예사' 대표를 맡았다. 1983년 9월부터 원고지 1만5천 매 예정으로 '현대문학'에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89년 태백산맥 제4부를'한국문학' 1월호부터 연재 시작하여 11월호까지 완결하였다. 이에 제4부도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함으로써 전 10권을 완간하기에 이른다. 태백산맥 완결을 고대하며 투병하시던 아버지의 별세를 소설을 쓰다가 전화로 연락을 받게 되는데, 소설의 완결까지 단 1회분 반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이러한 작가의 놀라운 집념과 몰두 속에 탄생한 태백산맥은 '80년대의 '금단'을 깬 대표소설 ('한겨레신문'), 신문 문학 담당기자와 문학평론가 39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작품' 1위,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시사저널', 전국 대학생 1650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 1위('중앙일보') 등의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1984년에 '한국문학' 발행인이 되었고 1997년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