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준(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조준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 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 >'''조준 졸기''' 실질적인 제도 개혁에 있어서는 [[정도전]], [[남은]] 등을 포함한 주역 건국 공신들 중에서도 '''핵심적 주체로 꼽히는 인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개혁』, 김당택]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田制) 개혁을 통해 새 왕조 출현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쌓고,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려말 개혁의 청사진을 혼자 그리다시피한 조선 건국의 핵심으로 정도전이 친우였던 이숭인을 내치고 조준을 가까이 하려고 했던 모습이나 요동 원정 문제에 있어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준의 위치를 엿볼 수있다. 조준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이라고 볼 수 있는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필요하고 또 개혁적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서 자신이 주동적으로 적극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정치적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 간섭기]]를 통해 성장한 [[평양 조씨]]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권문세족의 일족이었음에도 시대의 변혁에 휩쓸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문제의 실질적인 분석,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그리고 이를 시행하는데 필요한 행동력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왕씨와 이씨의 정권 교체''' 수준을 벗어난 진정한 세대 교체를 이루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준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개혁안을 내었는데, 이는 조준의 폭넒은 식견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준이 그러한 악습과 부패를 적극적으로 시정할 의사가 있는 인사였음을 보여준다. 조준은 [[성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고 다른 인물들처럼 전대의 태평성대를 모델로 하여 고려 말기의 혼란과 부패를 해소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준은 '''기강의 확립'''과 '''실제 행정을 담당하는 지배 계층의 행정 수행 능력'''을 중시하며, 그의 개혁안에서도 이러한 점이 엿 보인다는 점이다. '''조준의 재상론'''은 [[정도전]]식의 '''자기 수양을 부지런히 하고 군주의 나쁜 점을 바로 잡는 도덕적 [[재상]]'''보다는 '''국가 통치에 필요한 행정 실무 능력'''을 더 중요시 했다고 여겨진다. 조준의 무수한 건의와 제안, 개혁들은 단순히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분을 떠나 '''"실질적으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절실히 보여주었고, 비록 실제 적용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의 변동은 있었을 지언정 대부분 수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조준은 500년 왕조인 조선의 개국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세운 [[정치가]]로써 [[한국사]]의 정치가를 통틀어서도 차지하는 입지가 꽤 크다고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조준이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기에 [[성균관]]을 통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성리학자들이 육성되고 개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정도전이지만, 조준은 이와 달리 독자적으로 공부를 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마련했고 이성계라는 동조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실행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만큼 [[이성계]]로부터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워낙에 신임이 두터웠기에 만년에 이를수록 이 때문에 비방을 듣기도 했다. 여러가지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정치가지만, 대중적인 인식에서는 저평가를 떠나 '''"아예 그런 사람 있나?"''' 싶은 정도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편이다. --이 양반도 솔직히 사극 주인공 한 번 해야 하는데-- 조준과 정도전이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일 혹은 정도전이 아닌 조준이 주도한 제도 개혁들조차 정도전이 주도한 것 마냥 왜곡되고 있다. [[정도전]] 재평가를 주도한 원로학자 [[한영우]]의 학설을 기반으로 이 환경이 재구성한 [[용의 눈물]]과 [[정도전(드라마)|정도전]]이 워낙 히트를 쳐서 이 캐릭터를 2020년대 이르도록 [[여말선초]]를 다른 사극들까지 일관되게 가져다 써서 대중들에게 전혀 피드백이 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 최초의 성문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은 [[조선 왕조]] 법전의 중대한 근간인 [[경국대전]] 반포 이전까지 조선 왕조의 정치, 사회 질서에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물건으로, 이는 조준의 주도로 편찬되었기에 조준의 사상이 조선 초기 국가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헌데 대중적 인식에서는 정도전의 사찬 사서인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훨씬 더 각인되어 있거나, 혹은 경제육전 등도 정도전의 주도로 편찬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경국전은 사찬이므로 명목상의 법전이고, 조준의 원육전은 태조 초기에 완성된 정식 법전으로 이후에 속육전을 거쳐서 이어졌으니 역할의 비율이 완전히 다르다. 이후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을 원육전 혹은 조준육전이라고 부르고, 이걸 태종시기에 개창한 것을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종 시기에 [[이직(조선)|이직]]과 [[황희(조선)|황희]]의 손에 수정을 거친 것이 [[경국대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조선]]의 시스템은 사실상 조준과 [[하륜]]이 만들었다고 봐야한다.''' 조선 건국 후 막강한 권한을 움켜진 정도전조차 일부러 조준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조준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을 정도이니, 조준의 무게감은 거대하다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