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준(조선) (문단 편집) === [[태조(조선)|태조]] 시기 === [[조선]] 건국 이후에도 조준은 이성계의 돈독한 신임 속에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즉위한 바로 그날 저녁 몰래 조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다 대뜸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하겠다."며 [[나라]]의 군권을 맡겼다. 이후 개국 [[공신]]의 위치를 정할 때[* <[[조선왕조실록]]> [[태조(조선)|태조]] 1년 8월 20일 2번째 기사] 조준은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었던 [[배극렴]]에 이어 우시중(右侍中)으로서 바로 다음에 언급되었는데 조준보다 먼저 언급된 유일한 인물인 배극렴이 곧 [[사망]]하였고 바로 문하좌시중에 임명되어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파격적인 대우에 [[권력]]이 조준, [[정도전]], [[남은]]에게 집중되자 이에 대한 성토도 나왔을 정도인데[* <조선왕조실록> 1394년 11월 4일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04_002|#]]] [[변중량]]은 "정도전, 남은, 조준이 [[정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헌데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그 사람들은 내가 제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인데 어디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들을 의심해? 괘씸한 놈!"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변중량을 [[감옥]]에 집어넣었을 정도.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는지 조준은 그 이전부터 [[평양시|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는 등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권력을 내려놓으려고 해도 이성계가 윤허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신하]]가 권력을 사양하는데 [[임금]]이 억지로 군권 등을 더해주는 괴이한 일이 발생한 것. 이성계는 조준이 [[피부]]병으로 몸져 눕자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면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나라 일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게 요양해라."고 당부하는 등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이 무렵까지 정도전과 조준은 서로 친하지도 않고 서로가 하는일에 관여하는 일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존중은 하는 사이였다. 이들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정도전, 남은 등이 [[요동]] 원정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정도전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1397년부터는 둘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는데, 남은의 경우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했던 반면에 조준과 김사형은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 조준과 김사형이 반대하자 여기서 남은이 앞장서서 조준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저지르는데, 정도전과 조준 사이가 요동 정벌에 대한 의견 차이로 벌어지기 시작하던 와중에 신덕왕후 강씨의 릉과 관련된 문제로 조준과 김사형의 당여로 볼 수 있는 유원정과 조화, 신효창이 엮여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남은은 조준과 김사형을 해당 사건에 엮어 정치적인 위신을 실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이는 처음에 관련된 문제로 국문을 당하던 전시가 끝까지 조준과 김사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한다. 조준은 얼마 뒤에 병으로 인하여 휴가를 청하였는데, 정도전, 남은 등이 찾아와서 군사를 출병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하자 조준은 "사대의 예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의 위세가 엄청난데 무슨 공격임?"이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조준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때마다 조준은 "지금 [[천도]] 이후 나라 [[백성]]의 사정이 좋지 않아 원망이 많은데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따르기능 하겠음? 요동 치려다 나라가 망해요."는 식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결국 병중에서 일어나 이성계를 찾아가서 재차 요동정벌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ㅡ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성계는 조준의 말을 듣고 좋아했는데 사태가 계속 이렇게 되자 남은은 화가 나서 조준에게 "댁들 같은 작자들하고는 큰일을 논할 수 없다."고 [[디스]]를 했다. 이 때부터 남은은 조준과 사이가 멀어졌고 이성계 앞에서 조준을 험담하기도 했다.[* 창고 관리나 장부 정리 등 말단 [[행정]]직하면 딱이라고 대놓고 뒷담화를 깠는데 물론 그 배후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 부분이 반영되어 남은이 요동 정벌에 반대하는 조준을 일컬어 말, 되나 세던 사람이라고 디스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개소리 하지마!"라며 남은을 질책했지만 이성계는 남은도 아꼈기에 따로 벌을 주거나 하지는 않고 조준에 대한 [[욕]]만 못하게 했다. 또다른 문제는 바로 [[세자]] 책봉 문제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방원)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청했는데, 사실상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무안대군|이방번]]을 밀었고 [[재상]]들은 신덕왕후의 소생이 되어야 한다면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상의하여 배극렴이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시라고 주청을 올렸다. <태종실록>에는 강씨가 엿듣고 [[눈물]]을 흘리자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고 이방석을 세자로 삼는 것이 결정된 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틈이 생긴 상황에서 [[무인정사]]가 벌어졌다. 당시 정도전, 남은과 좌정승 조준은 알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준은 이방원 일파와는 달리 그리 급할게 없던 상황이었기에 [[왕자]]들의 싸움에 깊게 말려들어갈 이유는 별로 없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준은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려고 했는데 이방원이 자신을 소환하자 사태가 어찌 흘러갈지 [[점]]을 쳐보며 질질 빼고만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방원은 [[이숙번]]을 보내 우정승 김사형과 조준을 데려왔고 그 때서야 조준은 나와 이방원에게 동조하였다. 다만, 이 점을 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려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준은 갑옷으로 무장한 가병들을 거느리고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반란]] 진압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이 기운 것을 깨닫고 이방원에게 설득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건 이방원을 위해 움직였으므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는 조준이 지속적으로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을 벌인 탓도 있고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적장자 쪽을 지지했기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나쁠 것이 없었다. 난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신구 세력간의 갈등을 막아줄 수 있는 이름있는 원로 인사라는 측면도 있었다. 난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움직이는 와중에서도 조준과 김사형은 계속 [[정승]]의 자리를 유지한 것이다.[* 원래 이런 일에 직접 힘쓴 사람들이 2등공신이 되고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원로들이 1등공신이 되는 일이 있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총알받이 겸 물귀신 작전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