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중훈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경기도 경성부 미근정(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지주로 직물도매상을 하던 아버지 조명희(趙命熙)와 어머니 태천즙(太天楫) 사이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학, 과학, 공작 활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조중훈은 [[서울미동초등학교|미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현재 미동초에 남아 있는 조중훈의 학교 기록에 의하면, "승부 근성이 강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 기억력과 상상력이 뛰어나고 공작 활동을 좋아한다."고 나와 있다.]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아버지가 차렸던 종로의 직물점이 부도나 자퇴한 후, [[서울특별시|경성부]]를 떠나 국비지원교육기관이던 [[한국해양대학교|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 고베로 떠나 후지무라조선소의 수습생으로 취직해 갖은 고생을 하며 1940년에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서 홍콩, 마카오, 필리핀 등지를 돌았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유대인 상인들과 중국인 상인, 개성 인분 장수들을 접하며 상업철학을 깨우쳤다.[[http://news.donga.com/3/all/20141225/68762245/1|기사]] 1942년에 귀국한 후 엔진을 재생하는 데 필요한 보링 기계 1대를 사서 '이연공업사'라는 자동차 정비 업체를 세워 첫 성공을 거뒀으나 이듬해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기업 정비령[* 일제 말기 조선에 있는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들을 군수지원체제로 바꾸고자 한 제도.]'에 따라 일본의 군수업체 [[마루베니]](丸紅) 사에 강제로 뺏겼다. 이후 일제의 강제징용 정책으로 인해 경성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용산공착장]]에 강제 징집되어 근무하다 해방을 맞은 뒤인 [[1945년]] 11월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당시 모은 돈으로 트럭 1대를 사서 [[인천광역시|인천]]에 한진그룹의 시초가 되는 운수업체인 한진상사를 창업하였고, 1947년에는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부여받았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차량과 장비들이 군용으로 징발되기도 하는 등 잠시 침체기를 거치기도 했으나, 1953년에 인천으로 돌아와 가건물을 세워 재건에 주력했다. [[1956년]] [[주한미군|주한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전쟁]] 때인 1965년에 초대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1966년]]에 파병되는 [[미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및 물류 전문 재벌로 키웠다. 월남 사업 동안 전쟁터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베트남 쌀이 입맛에 맞지 않는 직원들을 위해 한국에서 쌀을 공급토록 하며 현지 김치공장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 때 크게 성장한 한진그룹임에도, 물자를 나눠쓰고 신변을 호위해주는 등 성장을 적극 도와준 군과 파월장병들이 [[고엽제]] [[후유증]] 문제로 고통받을 때 그에 대한 지원 요청을 외면한 장본인이기도 했다.[[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36264|#]] 조중훈은 [[항공]] 사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60년에는 '한국항공'이라는 민간 항공회사를 세워 당시로써는 최신형 기종인 40인승짜리 콘베어 240기와 경비행기 [[세스나 180]]기를 사서 서울~부산 간 노선 취항 및 에어택시 사업으로 재미를 보았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정이 대한국민항공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함에 따라 결국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다 운명의 장난인지 1969년 정부의 권유로 당시 부실 상태인 대한항공공사를 사실상 반강제로 인수해[* 그것도 '''1969년 당시 27억 원'''의 빚을 모두 떠안는다는 조건 하에 인수대금 14억 5,300만 원을 주고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것이다. 후술되어있듯 조중훈도 사실 정부의 강압에 울며겨자먹기로 인수한 것이었다.] '[[대한항공]]'이란 명칭으로 변경하며 민영화해 다시 항공 사업에 뛰어든다. 어찌됐든 항공 사업을 다시 시작한 이상, 조중훈은 먼저 국내선에 일본산 여객기인 [[NAMC YS-11|YS-11]]기를 사들인 뒤 당시 외국 항공사들이 독점한 국제선 노선에 눈을 돌려 그 해 서울 ~ 사이공(현 호치민) 노선을 열고, 1971년에 미주 노선까지 확대했다. 이런 해외 비즈니스 수요로 걱정했던 것보다 재정이 안정화되었고 1980년대 후반 올림픽 개최로 인한 해외관광객 수요증가 및 1990년대 해외여행과 해외유학붐에 따른 비행기편 증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는 [[다혈질]]적인 측면은 있었다고 하나 KAL 대표로서 일찍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직접 달려가 정비 현장을 시찰하며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1967년에는 대진해운([[한진해운]] 전신)을 세워 해운업에도 손을 벌렸다. --하지만 결국 파산크리.-- 그 외에도 1961년 8월에는 '[[한진고속|한진관광]]'을 세워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사서 서울 ~ 인천까지 운행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 삼성그룹으로부터 [[메리츠화재|동양화재]]도 사들여 금융업을 개시했다. 1968년에 학교법인 [[정석인하학원|인하학원]]을 인수해 육영 사업까지 확장했다. 1987년과 1988년엔 부실기업 대한선주와 대한조선공사를 각각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키워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진 대의원 선거에서 [[거수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에어버스]] [[A300]] 여객기의 성공적인 운용 및 [[에어버스]]의 외국 판로 개척을 열게 한 공로로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중 2등급인 그랑도피시에를 받았다. 1999년 4월, [[대한항공 6316편 추락 사고|상하이 KAL기 추락사고]]에 책임을 지며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직을 장남 [[조양호]]에게 넘기고 그해 10월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4477750|탈세]] 사건으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대체로 나타나지 않았고[* 별세 1년 전인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청운동]] 자택의 빈소를 찾아 "우리나라의 거목이 졌다"는 멘트를 남겼다.] 2002년 11월 17일에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0225993?sid=101|사재 1천억 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인하대학교병원|인하대 의대 부속병원]]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으며, 동월 21일 서울 [[김포국제공항|김포공항]]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유해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 선영에 안장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