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훈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조헌영]]과 어머니 [[전주 류씨]] 류노미(柳魯尾)(류진희(柳進熙)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서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있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과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 전통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로 써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고 검정고시를 쳐서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합격했으므로 일제식 교육을 일절 받지 않았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사망시까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재직 당시 지은 [[고려대학교]]의 [[고려대학교/상징#s-2|교가]]와 '[[호상비문]]',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1960년에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제자들의 [[4.18 의거]]를 지켜보고는 같은 해 [[4월 20일]]에 지은「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하여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000년대 초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시비가 고려대 문과대학 부근에 설치되었으나, 반정부 시위를 옹호하는 해당 시의 내용이 학내에 비석으로 세우기에는 너무 과격하다고 본 것인지, 얼마 안 가 '승무'의 시비로 교체되었다.] 고려대 교정 내에 있는 4.18 기념비문도 그가 지었으며, 고려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없음을 꾸짖은 전례가 있을 정도로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후배 문인 중엔 대선배인 [[서정주]]보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민권 수호 국민 총연맹, 공명 선거 추진 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김수영(시인)|김수영]]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적이었다면 조지훈은 그 반대로 세속적인 이해와 타협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5월 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 합병증으로 인해 만 4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그를 디스했던 김수영 시인도 한달 뒤인 6월 16일, 46세의 나이로 교통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1982년]]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