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창 (문단 편집) === 죽음 === 왕이되고 다음 해인 223년,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죽었다. 임성위왕창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따르면 이전에 조창이 옥새와 인수끈이 어디있는지 물으며 문득 다른 뜻을 가졌기에 조비는 조창이 조정에 들어왔음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 이에 조창은 분하고 성내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고 한다. 정황상 조창의 죽음은 조금 미묘한데, 조비는 조창과 조식이 정치 권력을 쌓는 것을 경계하여 왕으로 봉한 다음 임지에 머물게 하고, 수도로 올라오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비의 형제들은 각자의 봉지에 연금된 상태였다.[* 예외는 가장 어린 동생인 [[조간]] 정도 뿐이었다.] 따라서 조창이 수도로 왔다면 분명히 조비가 조창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다. 줄이자면, 다른 형제들을 모두 연금한 조비가 뜬금없이 '''조창만''' 수도로 소환했고 그러자 '''조창이 죽은 것이다.''' 《[[세설신어]]》에 조창의 최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비가 조창을 불러서 연회를 열면서 독을 넣은 [[대추]]를 안주로 줘서 죽게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조비와 조창의 생모인 [[무선황후 변씨|변씨]]가 이걸 살려보겠다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려 하자 아예 두레박 끈을 모조리 잘라 치워버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세설신어》는 특성상 사서가 아니므로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고 실제로 황실의 이야기가 바깥에 퍼질 리도 없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조창의 죽음을 상당히 미심쩍게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의 주된 독자들은 그냥 일반 평민이 아니라 당대의 귀족 계급으로,[* 《세설신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귀족들의 살롱 문학이다.] 당시에 이미 귀족 사회에서도 황제와 형제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조창의 죽음을 미심쩍게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를 무작정 배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면 역사서로도 이를 입증 가능하다. 진사왕식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씨춘추에 의하면 "이 당시 제왕(諸王, 조조의 아들들)에 대한 법은 준엄하고 엄격했고 223년 임성왕 조창이 갑자기 죽자 '''제왕이 같은 고통을 느껴''' 우정의 감정이 싹텄다". 조창이 죽었을 뿐인데 뜬금없이 '조조의 아들들이 같은 고통을 느꼈다'는 소리는 왜 나왔는가? 이미 이 당시 사람들은 조비가 조창을 죽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도 조창처럼 죽게 될까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믿은 것을 조비를 감싸야 했던 정사에 명시된 기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그마저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현대의 사람들이 조비가 조창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다. 조비는 조창이 죽은 뒤 즉각 뒤를 계승한 조창의 아들인 조해를 중모현으로 봉하고 봉토를 압류해 버린다. 그 뒤 1년 뒤 임성현으로 봉하였는데 그 뒤 [[조예]]가 즉위하고 나서야 임성국을 회복한다. 이때 조예는 그에게 [[식읍]] 2천 5백 호를 갖게 해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