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열등한 점 ==== >상이 이르기를, >“조총(鳥銃)만 한 병기가 없는데, 그대는 활과 화살을 좋은 병기라고 여기는가?” 하니, >유만증이 아뢰기를, >“조총이란 것은 일단 실수할 경우에는 신속히 탄약을 장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내에 사용하는 것으로는 활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 - 영조 4년 무신(1728) 3월 23일(계유) 맑음 * 탄약을 장전하여 발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는 단점이 있었다. 장전 후 발사에는 빨라야 분당 2발, 비 숙련자의 경우 장전에만 2분까지도 걸린고 조총의 느린 연사 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3단 사격같은 전술을 활용했지만 그마저도 조총의 장전시간이 워낙 길어서 시간을 조금 단축시켜 줄뿐 완전히 보완은 불가능했고 여전히 오랜 장전이 걸렸다. 반면 활은 숙련자의 경우 엄호 사격 시 분당 8발까지 발사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조총을 대단치 않게 여긴 원인 중 하나다. 조총의 느린 연사 속도는 다수를 운용하며 3단 사격같은 전술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는 보완되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오래 걸리는 장전 시간으로 그것 만으로도 완전히 보완되지는 못했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은 다수의 총병을 상비군으로 운영할 여력이 없었고 이후에 조총의 위력에 매료되어 포수를 육성했을 때에도 밀집화망이 아니라 [[지정사수|개인의 조준사격을 중시했다]]. 실제로 전투에서도 러시아가 극동에 진출했을 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고 파병된 조선군 포병들이 유럽에서 보편적이던 화망 형성이 아닌 단일 사격을 했다는 것을 러시아 측에서 기록한 바가 있다.] 이 때문에 조총은 부동자세에서 사격은 좋았지만 직접 마주보고 하는 전투에는 꽤나 불리했다. *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구조라 날씨에 따라 사용 여부가 좌우된다.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불면 [[우산]]이라도 쓰지 않는 한 사용이 불가능했다. 여기에 착안해서 일본의 경우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기도 했다. 그래봤자 효과는 별로여서 금방 사장되었다. 우산 자체도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 바람이라도 불면 우산으로는 화승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궃은 날은 활이든 조총이든 가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총수가 화약을 총구에 넣는게 힘들정도로 바람이 심한 날이라면 활을 쏘는 사수입장에선 바람의 방향이 맞바람이 되는 순간 활을 쏘면 자기 발밑에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조총수가 화약이 비에 흠뻑 젖어 조총이 몽둥이만도 못하다고 한탄할 수준이면 사수 입장에서도 몇발 쏘니 활아교가 풀려서 활이 분해되어 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각오해야한다. 날씨가 안좋을때 근접무기비율이 높은 군대가 과감하게 돌진하여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를 이기는 경우는 제법 있지만, 투사무기비율이 높은 군대끼리는 활이든 총이든 서로 악천후하에 전투자체를 꺼리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투사무기의 종류에 따라 날씨로 큰 이득을 보는 경우가 은근 찾기 힘들다.] 거기다가 당시 조잡한 기계기술의 한계로 인해서 습도가 높은 날씨에서는 고장나기 일수였다. * 명중률과 화약 낭비 같은 요소로 인하여, 집단 운용시 적과의 거리가 50미터 내외가 된 후에야 사격을 시작해야했다.[* 살상 거리 자체는 이것보다 길었지만 50m를 벗어나면 탄도가 일정치 않아 명중률이 뚝 떨어졌다.] 궁수들이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 분당 3발 ~ 10발 정도의 치명타를 쏘아대는 동안, 조총은 지근거리에서의 집단 운용이 필수적인 관계로 서양처럼 [[전열보병]]마냥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접근해야한다는 상황이 나온다. 즉 유효사거리가 짧다. 17세기의 조총들은 다른 동아시아의 병종을 보조하기에는 적합치 못했고, 서양처럼 화승총을 위한 보병 중심의 부대 편성을 해야 쓸만했던 것이다. * 사격 통제가 어렵다. 특히 조선이 도입한 순발식 화승총은 실수로 오발될 가능성이 높아 매복해있던 부대에서 실수로 오발하여 매복을 들키거나,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이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멋대로 발포하여 막상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는 재장전도 못하고 적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조선군이 청군을 상대한 사르후 전투 ~ 병자호란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다. * 조총과 달리 활은 곡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궁수는 전면을 창수 혹은 도검수에게 보호받으면서 안전하게 후방에서 사격할 수 있었다. 또한 공성전의 경우에도 수비병이 성벽 뒤에 숨으면 총은 별반 활약하기 어려웠지만, 활의 경우는 수비 측이건 공격 측이건 곡사를 통해 제몫을 할 수 있었다. * 조총은 당시 기술의 한계로 폭발할때 구름같은 연기를 만들어내는 흑색화약을 썼기 때문에 앞에 있는 병사들이 조총을 한번 발사하고 나면 현대 연막탄 수준의 연기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서 다시 조총을 장전하거나 조준하기에도 어려웠다. 이렇게 조총을 비롯해 1500년대부터 1600년대의 화약무기 및 화승총은 처참한 명중률과 오랜 장전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무조건 보병대와 섞는 전술을 구사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상 전투중 1600년대 스페인군은 이를 보완하고 화승총병의 안전과 장전시간을 확보시키기 위해 [[테르시오]]라는 전술[* 화승총병의 안전과 장전시간을 확보시키기 위해 [[파이크]] 창병과 조합시킨 전술로 화승총병 사격 후 화승총 병들이 파이크 창병 뒤로 물러나고 파이크 창병은 화승총병을 중심으로 고슴도치 대형으로 기마대의 접근을 막거나 보병에게는 압도적인 사거리를 이점삼아 찌르기로 화승총병이 장전하는 동안 접근을 저지시키는 전술이였다.]을 발안하였고 이 전술은 당시 유럽의 최대전력인 중갑[[기병]] 대특화전술로 각광받으며 너도나도 이 전술을 도입하였다. 게다가 옆나라 일본 경우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당시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카츠요리]]가 격돌한 [[나가시노 전투]] 당시에서도 조총병을 중심으로 한 보병이 주력인 노부나가와 조총의 카운터격[* 나가시노 전투 이전까지는 삼단사격 방식이 없었기에 조총은 한번 쏘면 오래 걸리는 장전때문에 기병에게 매우 취약하였다.]인 기병대가 주력인 다케다 가문의 싸움이었는데 조총병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보병과 기병의 접근을 막거나 방해하는 바리케이드를 친 뒤 조총병을 중심으로 운영하여 이겼다.[* 이 전투서 일본군의 유명한 사격조-사격대기조-장전조로 나눠 3교대로 쉴새없이 사격하는 삼단사격을 개발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보병과 기병은 조총병을 치기 위해서는 바리케이드를 부셔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조총병의 장전시간을 충분히 마련이 가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