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우월한 점 ==== >정원에 전교하였다. >“오늘 친림하여 시재(試才)할 때에 편전(片箭)이 조총만 못한 것이 수배나 되었으니, 옛사람이 ‘조총은 활보다 5배나 낫다.’고 한 말이 믿을 만하다. 이제 사복시(司僕寺)에 남은 말 30필이 있으니 순차적으로 [[훈련도감|도감 포수(都監砲手)]]에게 나누어 주라. 외방의 포수 및 살수와 무사 중에서 그들이 포를 쏘기를 자원할 경우 모두 3병(柄)을 한 차례 시방(試放)하고 서계(書啓)하도록 훈련 도감에 이르라.” >----- > - 선조 28년 을미(1595) 10월 8일(정미) >무기 가운데는 조총이 가장 정교한데, 습기가 차면 느슨해지는 궁노(弓弩)와는 달라서 불만 붙이면 반드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전적으로 조총을 쏘는 법을 익혀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게 된다면 어떤 적인들 꺾지 못하며 어떤 도적인들 막지 못하겠습니까. >----- > - 영조 1년 을사(1725) 4월 17일(갑신) * 전투 지속능력에 있어서 피로도가 조총이 활보다 덜하다. 일단 활의 장점으로 꼽히는 강력한 연사력은 '''일반 활'''에서나 가능하지, 100 파운드를 넘는 전투용 활을 당기는 일은 숙련자도 버거웠다.[* 일례로 [[전쟁기념관]]에 조선시대의 전투용 활의 복원품이 직접 만져보고 당겨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성인 남성의 힘으로도 여러 번 당기기 힘들 정도로 장력이 강했다. 단순히 당기기만 해도 팔이 금방 피로해지고 부들부들 떨리는데, 당긴 상태에서 가만히 유지하며 조준까지 하다 보면 숙련자가 아닌 이상 순식간에 체력이 바닥나버린다.] 무게는 둘째치고 지속적으로 시위를 당기면 손가락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지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 깍지 같은 보호장구가 필수였지만 급박한 전투상황에서는 깍지가 깨지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인력에 의존하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속도 뿐만 아니라 활의 특성상 사거리와 관통력 까지 떨어지게 된다. 팔과 손가락에 힘이 빠져 부들부들 떨리게 되면 정확도까지 급락한다.] 하지만 조총은 특성상 장전에 체력을 필요치 않고, 조준할 근력만 있으면 되기에 '''꾸준한 화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실록에도 힘이 강한 자는 활을 주고, 약한 자는 총을 주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39년인 1763년 3월 6일 일본에간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조선의 전투용 대형 활인 육량궁을 장사라 자부하는 일본인이 당겼으나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힘 뿐만 아니라 요령도 있어야 했고 조선 통신사 일행은 왜인들에게 자신들의 용력을 자랑하기 위해 자주 무관들을 데리고가 시연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 육량궁은 활의 장력이 얼마나 강한지 부상자가 속출할 정도였으며, 육량궁을 쏠때 반동 때문에 달려나가면서 쏴야 된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어깨와 팔목을 다치는 자가 많아 육량궁을 폐하자는 소리까지 나올정도 였는데, 전투용 활이 얼마나 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는 부분으로, 현대인이 생각하는것 처럼 쉬이 간과할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지난번에는 더러 육량전을 시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사군관들이 궁시(弓矢)를 가지고 갔는데, 저들이 그 장대함을 보고, 인가를 다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만두기를 간곡히 청하였다. 그런데 개중에 한 건장한 왜인이 허세로 용력을 과시하며 대궁 당기기를 청하였는데 들으니, 이는 그들 중에서 장사라고 일컫는 자라고 하였다. 조 비장이 시험 삼아 쉬운 듯이 가볍게 한 번 당겨보이고는 그 왜인으로 하여금 당기가 하였더니, 그 왜인은 이를 악물고 팔뚝을 뽐내어 힘을 다해 당기었으나 오히려 활 시위를 벌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활을 팽개치고 달아나면서 [[데헷|혀를 빼물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휘저었다]] 한다. 아무리 용력이 있더라도 이미 쏘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당길 수 있었겠는가! - 조엄, 해차일기 영조 39년.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355580296|출처]]] * 실전에서의 유효사거리는 조총이 오히려 더 길다. 조총은 사거리가 짧고, 활은 길다는 것 자체가 오해이다. 화약이 폭발하는 에너지로 발사되는 투사체와 장력으로 발사되는 투사체 중 어느 쪽이 멀리 날아갈지는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수군 전술교범인 수조규식(水操規式)에도 조총은 적의 100보(120m) 전방, 활은 적의 90보(108m) 전방에서 사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조 19년 을묘(1795) 2월 9일(신유)자의 실록을 보면, 장용영은 1백보에서 조총을 쏘고 50보에서 사수가 활을 쏘게 되어있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V0_A19_02A_09A_00030_2005_021_XML|#]] 당대 조선군의 교리부터가 조총을 쏜 뒤 활을 쏜다고 되어있는데 조총이 활보다 사정거리가 짧다는 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상주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조선군의 궁시 사거리보다 밖에서 조총을 사격해 조선군이 피해를 입었고, 조선군이 활로서 반격했지만 일본군에 닿지 않기도 했다. 인터넷에 조총이 활보다 사거리가 짧다는 오해가 퍼진 것은 활의 최대 사정거리와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를 비교하는 [[뻘짓]]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반론: 조총의 명중률과 연사 속도를 고려하면 120m 전방에서 쏘는 것은 견제 사격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당대 조선 조총수들의 뛰어난 명중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나 수발식 머스킷[* 화승식인 조총보다 지발 가능성이 낮았으며 일반적으로 총신이 더 긴 머스킷이 명중률이 우월하다. 아예 불발이 될 확률은 수발식이 더 높았으나 수발식은 부싯돌로 직접 불꽃을 터뜨리는 방식이라 화승에 관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연사 속도는 수발식이 우위.]을 쓰던 [[전열보병]]들도 120m 거리에서 쏘지는 않았고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사격 통제가 되지 않아 너무 멀리서부터 쏜 것이 원인이 되었던 만큼 교리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재반론: 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피해를 입은 이유는 사격통제가 되지않아 화약이 다 떨어져서지 총이 안맞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초전에 청나라 군은 뛰쳐나간 조선군이 멋대로 쏜 조총에 피해를 입었다. 교리적 측면에서는, 조선군의 교리 자체가 화망 형성 위주인 전열 보병과 달리 조준 사격을 중시하는 차이가 있으며 조선군이 주로 상대해야할 적은 전열 보병과 달리 기병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한다. 후기의 조총병들의 숙련도는 서양의 전열 보병에 비해서 높은 편이라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장거리 사격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명중률이 못써먹을 수준은 아닌게 숙련된 사수가 사격하면 보병 상대로는 91m에서 75%의 명중률을 182m에서도 37% 이상의 명중률을 보여주었고 기병 상대로는 더 높은 명중률을 기록했다. 182m에서도 37%의 명중률을 보인다면 120m에서는 더 높은 명중률을 보일것이고 그 대상이 기병이면 명중률은 더 올라갈 것이므로 견제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장전 속도가 느리다는 문제가 있으나 그 문제는 조선도 인식하고 있었기에 5열 ~ 10열이 교대로 사격하여 사격간의 시간 간격을 최소화 하였다. 또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여겼기에 조총수가 재장전할 시간을 확보하고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살수와 사수를 배치하여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였다. 또한 앞에서 사격 통제가 되지 않아서 박살난 사례를 제시하였으나 적절한 사격 통제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기병을 상대로도 조총수들이 적절하게 대응하는게 가능하다는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 조총수들은 적절한 사격 통제로 후금 기병의 돌격을 한동안 저지하는데 성공했었다.[* '16세기 ~ 17세기 鳥銃의 도입과 조선의 軍事的 변화' 참고.] 간혹 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에서의 활의 사격 거리는 초시에서 목전으로 240보에 달했으며 유엽전으로 150보에 달했다는 점을 들어 활이 더 긴 것이 맞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장 목전 자체가 멀리보내기 시합용인 비전투용 화살이었고 전투용 화살인 편전은 130보, 철전은 80보로 훨씬 짧은 거리에서 시험이 이루어졌다. 또한 무과시험 사거리를 전투에서의 실 사거리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오류이다. 앞에서 상기한 거리들은 사람보다 더 큰 표적을 맞추는 거리거나 최대 비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설정된 거리이다. 그리고 실제 전장은 활터처럼 표적과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는 환경이 아니다. 활터에서는 예전부터 계속 쏘던 감이 있으니 그 거리에서 잘 맞는 각도로 화살을 쏘면 되지만 전쟁터에서 적과의 거리는 가변적이며,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기 어렵기에 사격각도를 설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밖에도 활의 성능을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실전에선 여진족이 날아가는 화살을 보고 피한다거나 갑옷으로 튕겨내 버리고 무력화 되지도 않는 등 냉병기로서의 활의 한계는 분명했다. 또한 오랫동안 수련한 일부의 명궁들을 제외하고, 오히려 미숙련 궁수들의 명중률 저조가 심각했다는 점, 조준 자체가 어려운 활의 특성을 생각해 봤을때 실전에서 활이 조총보다 더 나은 명중률을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조준기가 없는 전근대시대 활에게 장거리에서의 명중률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여진다. 군사전문가이자 히스토리 채널의 자문을 맡은 Kennedy Hickman에 따르면 백년전쟁 당시 영국 궁수의 경우 75~80야드 밖의 사람에 대해 명중률을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 폭발력으로 운동 에너지가 발생하는 총기와 장력으로 운동 에너지가 발생하는 활은 초기 형태인 걸 떠나서 위력에서부터 이미 넘사벽 차이가 난다. 유효 사거리 내에서의 조총의 위력은 대략 2000J인데 이는 현대 제식탄환인 5.56mm의 1900J을 뛰어넘는다. 쉽게 말하면 조총은 유효 사거리에서 활보다 더 확정적인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다. 당시의 총알은 현대의 총알과 달리 공기 역학적인 특성 등을 고려해서 만든게 아니라 단순히 에너지만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2차 대전기에는 3,000J의 에너지를 가진 소총탄도 위력이 약한 축이었고 강한건 4,000J까지도 갔었다.] 활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조선군은 선조 38년에 소수의 여진족 기병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는데 이때 얻은 전훈의 하나가 화살로는 여진 기병의 갑옷을 관통하기 어려우며 총통의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결함을 깡그리 무시하고서라도 조총을 쓸 가치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파괴력'''으로 이것은 조총의 장점과 단점 중 그 크기가 가장 크다. 화살은 맞으면 박히지만 조총탄은 맞으면 '''관통되어 계속 날아간다.''' 이것부터가 무서운 강점이다. 그래서 화살의 경우는 [[삼국지]]의 [[오(삼국시대)|오나라]] 장수 [[주태]]처럼 [[맷집]]이 뛰어난 장수는 몇 발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조총탄은 '''얄짤없이 골로 간다.''' [[하후돈]]이 [[여포]]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서 [[애꾸눈]]이 되었는데 그게 조총탄이었으면 하후돈은 그 때 100% 두개골이 부서져서 전사했을 것이다. * 조선의 활인 [[국궁|흑각궁]]도 습기면에서는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 물소 뿔을 어교[* [[민어]] 부레로 만든 것으로, 소의 힘줄 등에서 뽑은 [[아교]]보다 접착력과 탄력성이 뛰어났다.]로 붙여 이은 활이라서, 습윤한 기후에는 어교가 풀어져서 활이 망가질 확률이 높았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중에도 조총의 위력이 급감하는 [[장마]]철은 '''오히려 활을 주력으로 하는 조선군 측에게 더욱 불리한 계절'''로 인식되었다.[* 종특인 활을 쓰기 불리한데 그렇다고 근접전으로 붙자니 왜군 종특이 단병 접전이었다.] [[최영]]의 요동 정벌 당시 [[이성계]]의 '4불가론' 중 하나가 여름철이라 활이 불리하다는 논지였음을 기억하자.[* 승정원일기의 영조 1년 김시성(金始聲)의 상소에도 총이 활과 비교해 가지는 장점으로 습기가 찬 날에도 불만 붙이면 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 오랜 기간의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궁사 양성과 달리 조총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훈련시켜 전장에 내보낼 수 있다. 즉 물량도 조총병이 궁병보다 더 나온다.[* 이는 개인용 화기가 냉병기에 비교해 갖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궁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에는 1년이 걸리지만. 조총은 3일만 연습하면 실전 투입이 가능했다는 사료가 있다. 특히 어지간한 장정도 당기기 힘들어하는 활 시위에 비해 조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도 사용이 가능해 범용성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못했다.] * 즉 '''17세기까지는''' 활도 쓰기에 따라서 조총에 비교할 수 있었으나, 18세기부터는 훨씬 진보한 조총이 발명되면서 전략적인 훈련 비용이나 전술적인 중거리 전투력에 있어서도 조총에 비교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 잘 부각되지 않는 점이지만 조총을 발사할 때 나는 격발음은 적군의 사기를 꺾는다. 화약 무기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물론이고 어느정도 화약에 익숙해진 후라도 화약이 내는 굉음은 기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