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조선에서 ==== >군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 나라의 장기는 궁전(弓箭)이 최고인데, 편전(片箭)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妙法)은 조총(鳥銃)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단 조총을 사용하면서 편전은 전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새것만 좋아하고 옛것은 염증을 낸 나머지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과거를 보일 때마다 특별히 편전에 대한 시험도 보여 따로 상을 주기도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편전을 익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시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 - 인조 6년 무진(1628) 9월 29일(병술) >적을 방어하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장기(長技)는 원거리에서는 궁시(弓矢)이고 근거리에서는 도창(刀鎗)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종조에는 각 고을에서 월과(月課)로 군기(軍器), 궁시, 도창 (원문 빠짐) 임진란 후에는 단지 '''조총(鳥銃)만을 숭상하여''' 평상시 월과에서 도창을 완전히 폐지해 버리고 또 (원문 빠짐) 그 과목을 회감(會減)하였으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 그런데 조총이 개설된 후로는 (원문빠짐) 포수(砲手)라 호칭하고 모두 편안히 앉아만 있으면서 편전을 익히게 하지 않으니 또한 매우 타당치 않은 일입니다. 역시 해조로 하여금 조종조의 옛 규례에 따라 각별히 편전을 장려하여 급한 상황에 대비하는 계책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인조 4년 병인(1626) 4월 8일(경진) * 사실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명제 자체가 의심스럽다.''' [[승자총통]]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화력덕후|화약 무기를 통한 화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개인용 소화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다만 화약 무기 다음으로는 활이었다. 지형상 성에서 싸우든 산과 숲에 의지해 싸우는 방식을 많이 취했는데 (적어도 방어전에서는) 그러기 위해서는 칼보다는 활이 낫고 포는 성에서는 모를까 산이나 숲에서는 무리였다.] * 조정이나 일선에서 거론했던 궁시 만능 이론과 조총 회의론은 무기 자체의 성능보다도, 구시대적인 '''군기'''를 강조하는 정신론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요즘 군인들은 총이나 쏘니까 군기가 빠져가지고 말이야"라는 식의 보수적인 군인관에서 나온 주장으로 보는 것이다. 이게 영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아닌게, 조선은 궁술을 군인 기본 능력으로 보아서 활을 못 쏘면 진급도 안 될 정도였고, 궁술을 군인들의 군기 / 훈련도를 가늠하는 제식 척도로서 챙겼기에, 이런 주장을 반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총 개조가 진행된 이후, 오히려 후기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음을 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궁술은 선비들의 교양 과목 중 하나였으며 싸우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수양으로 활용하는 전통 무예였다. 그러므로 조총의 전술적인 중요성을 둘째 치고 궁술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당시 사상을 거스르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위에 사료를 볼때도 일반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문과가 아니더라도 엄밀히 과거를 보고 기본적으로 선비가 돼야 하는 무관들이 궁술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자세를 한탄하는 모습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적인 중신들이나 무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선진적인 총기 도입 <<<<<< 병사들의 정신 무장"이라는 사고 방식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주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따져봐야하는 것은 어째서 활을 버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활이 총보다 장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총이 빨라봤자 분당 2발, 화살은 분당 8발이나 가능한데, 장전하는 사이에 칼맞아 죽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 화살의 사정거리를 근거로 들어 궁시의 잔류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론도 있으나 실상 훈련용으로나 쓰인 목전 혹은 숙련된 자들이나 쓸 수 있었던 편전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더 우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조선이 조총과 활을 운용한 교리를 살펴보면 조총을 다 쏜 뒤에 적이 더 "가까이" 왔을 때 활을 쏘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조선인 부터가 이미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앞섰다고 판단하진 않았다. 게다가 갑옷, 방패, 바리케이드 등을 고려하면 활의 실질적 사거리는 더 축소된다. 이보다 근본적으로 활이 계속 조선에 잔류한 이유는 조총이 계속해서 화승을 쓰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중 적이 언제 어떻게 기습할지 모르는데 화승은 그 특성상 계속해서 유지할 수도 없었고 기습중에 (기습을 방어할 때나 혹은 기습으로 공격을 가할때나) 갑작스레 불을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한창 회전이 이뤄지는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역시 화승의 특성상 언제 불이 꺼져버리거나 격발 불량이 일어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며 이를 보조하기 위해 언제 어느때나 사용할 수 있었던 활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기병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비록 조선도 나중엔 총기병을 육성하긴 했으나 화승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기병이 조총을 다루는 건 힘든 일이었다. * 18세기 이후에는 조총이 활보다 유용한 무기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조총이란 말 자체가 동아시아의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고, 사용기간이나 기술 발전에 따라서 전기형 ~ 후기형으로 나뉜 점도 있으니, '''활 VS 조총'''이라는 주제 자체가 이런 무기의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비교인 것이다. 애초에 조선군에서도 자체 개발한 조총이 활보다 유리한 성능을 가지게 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진왜란까지는 활과 조총이 비등했으나, 이후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역할이 변경되었으며 실제로 관련 논의에서도 어디까지나 '활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유지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가 주로 논의되었다는 점도 결코 간과하면 안 된다. 사실 조선군도 조총의 대형화 혹은 장총신 버전인 [[천보총]]을 만드는 등 결코 조총을 천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바탕으로 보면 '조선은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말도 당대의 일부 시각이었을 뿐이지 결코 대세는 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일례로 [[병자호란]] 당시에 청군은 조선군 조총의 긴 장전시간을 노려 [[기병]]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는 전술을 사용했다. 조선도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활을 든 병사들로 하여금 조총수들을 보조하게 했지만, 그래도 많은 청군의 정예 기병의 충격력을 감당할 만큼 충분한 화력은 나오지 않았다. 당장 호란 당시 조선군의 70%가 조총수였지만 이를 보조할 궁병이나 장창병이 모자랐다.] * 조선 중ㆍ후기의 주력 장거리 무기가 활이었다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 조선의 주요 군사 기관이었던 훈련 도감과 어영청 역시 조총 부대에서 유래되었으며 광해군이 명나라로 파견한 15,000명의 조선군 다수 역시 조총 부대였다.[* 원래 1/3 살수(창병) 1/3 사수(궁수) 1/3포수(조총수)였지만 5,000명의 포수가 더해지면서 포수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15,000명 중 8,000명 이상이 조총수였던 셈이다.] 임진왜란 때 조총은 조선과 명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일기나 인조 실록을 보면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조총을 구입해오라는 지령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힘과 숙련도가 어느 정도 필요했던 궁수나 근접병에 비해 비교적 훈련이 쉬웠던 포수는 조선의 주력 부대였던 속오군에게 딱 걸맞는 무기였다.[* 속오군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전시에 징집되는 농민들이었는데 현재 [[예비군]]과 비슷하다. 하지만 훈련도도 형편없고 농사가 끝난 뒤 주기적으로 훈련하는 부대였지만 돈이나 곡물을 바쳐 훈련을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숙련도는 낮았다.]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확연히 보이는데 1600년대 속오군의 병종 비율의 무려 76%가 조총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