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일본에서 === ||[youtube(g7KOIkTiF00)]|| 1543년 9월 23일 일본 [[타네가시마(가고시마)|타네가시마]] 섬에 표류한 중국 상선에 승선했던 [[포르투갈]] 상인한테 타네가시마 영주가 시가 2억 엔 정도의 은을 지불하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한 것이 조총(鉄砲 철포)의 기원이다. 영주 타네가시마 도키타카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대장장이에게 이것을 복제하도록 명령했고 그 대장장이가 노력 끝에 화승총을 복제해내는데 성공하면서 철포가 일본에 퍼지게 되었다. 다른 설로는 그 일본인 대장장이가 복제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자 자기 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바치면서까지 제작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카사 충효비가 바로 그 딸들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도 있지만 일단은 앞의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어찌됐든 이로 인해 이 거래가 진행된 섬인 종자도([[타네가시마]])는 그대로 철포를 일컫는 별명이 되었다.[* 다만, 포르투갈인이 전해주기 전에도 '철포'에 관한 기록이 간간히 등장하기 때문에, 그 전에 중국이나 한국을 통해 총기류가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최초가 아닐 뿐, 타네가시마에 전래된 화승총이 일본 전국에 폭발적으로 확산한 결정적 계기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철포를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다. 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철포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였다. 사무라이의 전통과 동떨어진 무기인데다가[* 단순히 구시대적 사고관때문에 거부한게 아니라, 서양의 기사들이 그랬듯이 보다 어려운 근접전을 담당해야 하는 입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관심을 줄 이유가 없다. 실제로 기사와 비슷한 계층이었던 중세 이슬람교 사회의 [[맘루크]]들은 화승총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고, 정부가 노예들로 화승총 부대를 만들려고 하자 폭동을 일으켜 화승총 부대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조총의 작동 방식의 한계 때문에 이것이 실전에서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였던 만큼 철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도입하는 [[다이묘]]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 중 [[오다 노부나가]]는 적극적으로 철포를 받아들여 전술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센고쿠 다이묘였다. 가장 강성한 다이묘 중 한명이었던 노부나가는 대규모의 철포 부대를 운용할 수 있었는데 철포의 특성상 이러한 대규모 부대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 철포를 일본 전국에 퍼뜨린 공을 세운 인물은 일반적인 무사가 아니라 [[승병]]인 쓰다 산초(津田算長)였고, 쓰다를 중심으로 한 승병 겸 용병집단인 네고로슈(根来衆)는 노부나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575년 전국시대 일본의 판세를 바꿔 놓은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철포 부대가 활약하며 승리를 거두면서 조총은 일본 군대의 주요 전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다만 이 전쟁에서 노부나가 부대가 "삼단 철포" 전술을 운용했다는 과거의 통설은 후술된 바와 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국 시대 철포 부대의 일반적인 전술은 방패수가 철포 아시가루들 앞에서 적의 활이나 철포탄을 방어해주고 그 뒤에서 철포 아시가루들이 엄호받으며 발사하는 식이었다. 좀 더 조직적인 유격 부대는 방패수는 물론 탄약을 장전해주는 부사수까지 있었다.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중세 시절에 갑옷을 무력화하는 용도로 쓰이던 화약 무기가 '''마침내 동아시아의 강력한 활이나 석궁에 버금가는 편의성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또한 조총이 아시아에 도입된 이후 다양한 개량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의 대조총, 한국의 [[천보총]] 등이 있다. 대조총이 무지막지하게 굵다면 천보총은 총열이 무지막지하게 길다. [[파일:external/www.xn--u9j370humdba539qcybpym.jp/image0073-e1348019385256.jpg]] 일본에서 [[보신전쟁|토막파와 좌막파가 충돌할 당시]]의 대조총의 모습이다. 아예 서양식 포대에 얹어버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chugknvOC94|앉아서도 쏘는 듯하다.]] (맨 위의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손으로 들고 쏠 때는 온몸으로 껴안고 쏘고 나서 검도에서 기검체일치 지키는 것 마냥 기합까지 지른다. 다만 에도 시대가 열린 이후 일본에서 조총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전쟁은 끝났고, 섬나라이니만큼 주변국의 위협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위층들인 사무라이들 입장에서는 별 훈련을 받지 않은 빈자들도 한방에 무사를 죽일 수 있는 총이 영 고깝게 보였다. 안 그래도 농민들을 심하게 착취하는데 이들이 총으로 무장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무사들 입장에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칼을 무사정신의 정수로 취급하는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총은 전국시대의 지위를 잃어갔다.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각지의 총술이 무술 유파화하기도 했고 막부 직속 군대의 경우 지속적으로 화기를 납품받아 다수가 소총으로 무장했다. 도호쿠의 미개척지에 사는 사냥꾼([[마타기]])들도 썼고. 또 일부 장인들은 서양 플린트락을 모방한 총들을 시험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조선처럼 일본에 좋은 부싯돌 산지가 없다는 점, 그리고 사철을 이용한 일본의 낮은 야금 기술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일본의 지위 및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국가적인 차원의 신형 소총 개발 및 소총을 이용한 실전적인 전쟁 전술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총술 또한 예식적인 무술로 변화한다. 오히려 이후로는 가상적국으로 둘러싸인 조선에서 조총 전술이 더 발전한다. 《[[병학통]]》이 그 예. 이후 조총은 19세기 중반 일본이 개항한 이후 도입된 [[퍼커션 캡]] 라이플과 [[샤스포 소총]]에 자리를 내준다. 민간에 사냥용으로 풀린 것들 또한 20세기 초 [[30년식 소총]]이 제식화되고 [[무라타 소총]]이 민간에 불하되면서 일부 장인들이 제작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자취를 감췄다. [youtube(Tj3N432V4A4)]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 모습으로, 중간에 대조총(大筒 おおつつ)을 안고 발사하는 모습과 지지대에 올려 쏘는 모습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