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흥은행 (문단 편집) == 역사 == 1878년 [[미즈호은행|제일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조선에 진출해 일본의 경제 침탈이 우려되면서 한국인들은 "근대적 금융기관을 설립해 자국 상공업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리하여 1894년 조선은행, 제국은행, 한흥은행 등이 설립했으나 한 해도 못 가 단명했고, [[1897년]] 한성은행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순수 민족 자본 은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03년]] 민영에서 공립으로 개편됐으나, 1910년 [[한일합병]] 뒤 주인은 일본인들에게 넘어갔고, 1938년 해동은행 매수 후 1941년 경성합동은행, 1942년 동일은행[* 1931년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본가였던 조선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을 합쳐 만들어진 민족계 은행.]을 각각 합친 뒤 [[1943년]]에 조흥은행으로 개칭했다.[* 참고로 조흥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간 은행으로서 '''[[조상제한서]]''' 중에서 필두로 불리며 은행 업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광복 후에는 발권 은행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는데, 이게 만약 실현되었더라면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가 발행하는 [[홍콩 달러]]처럼 '''조흥은행권 [[대한민국 원]]'''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홍콩 달러도 현지 금융 관리국의 통제 하에 HSBC, 스탠다드차타드(SC), 중국은행 등이 각각 할당량에 맞춰서 발매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은행 혹은 관련 부처의 통제에 따라 조흥은행이 화폐 발행을 대행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해방 이래 본행은 구 동일은행계 민씨 가문과 구 대구은행계 정씨 가문이 지배하며 주도권 다툼을 해왔다. 1957년 3월 입찰에서 민씨 집안이 관계사 [[조선맥주]], 계성, 휘문학원,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전무 지분을 합해 7만 8천 주(40%)를 확보해 승리했으나, 조선맥주의 경영 위기로 조선제분 사장 윤석준에게 지분 5만 2천 주를 8천 환에 매각했다가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지분 55%를 인수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민간 주식이 정부로 환수되었다. 1963년 기존 본점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점 건물 화재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곳이 바로 [[조흥은행 야구단]]이었다. 화재 복구 과정에서 비용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이유로 졸지에 해체됐기 때문. 이 즈음 여자농구단도 해체됐지만 본점 재건축이 끝난 1967년부터 다시 농구단을 운영하다가 1984년에 해체하면서 선수단이 한국빠이롯드로 넘어갔다.] 그 자리에 1966년 새 건물을 신축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 및 1983년 영동개발진흥 사건 2연타로 타격을 맞아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82년 [[BC카드|은행신용카드연합회]]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 1983년 3월 정부 소유 주식을 매각해 민영화된 이후 1984년 구 영동개발진흥 계열사였던 태평양투자금융을 인수하면서 사업확장을 시도해 같은 해 조원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하였다. [[파일:조흥은행 CI(1985-1999).svg|width=200]] 1985년 로고를 빨간 원이 세 개 쌓인 모양으로 변경했다. 1989년 조흥리스, 1990년 조흥시스템 등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고 1992년에 영진투자자문을 인수했다. 1994년 조흥경제연구소, 1995년 조흥파이낸스를 각각 설립 후 그해 7월부터 철도 승차권 자동 발매를 개시하였다. 동년 11월에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 은행 최고 법인 기업' 기록 인정서를 받았다. 1996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본점 옆에 '조흥 백주년 기념관'이란 빌딩을 준공하고 1997년 조흥백년재단을 세우고 광화문에 조흥금융박물관(現 신한은행 한국금융사박물관)을 개설했다. 위와 같은 무수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997년 [[한보사태]]로 우찬목 은행장이 구속되어 마가 끼기 시작했고, 결국 [[1997년 외환 위기|외환위기]] 때 자산 건전도가 심하게 떨어져 퇴출 은행으로 찍혀 버렸다.[* 공교롭게도 [[1997년]]은 조흥은행이 창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이후 1998년 조흥시스템을 청산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해 잘 수습해서 퇴출까지는 안 갔고,[* 사실 수습을 잘 했다기보다는 퇴출시키기에 규모가 커서 그랬던 것이다. 조흥은행 외에도 [[한국상업은행|상업]]/[[한일은행|한일]]/[[SC제일은행|제일]]/[[서울은행]] 등의 부실 은행은 널렸지만 이 은행들을 퇴출시켜 버리면 금융 시장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유발할 게 뻔했기 때문. 그래서 비교적 규모가 작거나 [[지방은행]]이었던 [[경기은행|경기]]/[[대동은행|대동]]/[[동남은행|동남]]/[[충청은행|충청]]/[[동화은행]] 5개가 퇴출된 것이다.] 1999년 4월 [[충북은행]], 9월에 [[강원은행]] + 현대종금과 합병하면서 공적 자금 총 2조 7,000억 원이 투입되어 그레이트 1단계 퓨전을 단행하며 같은 해 5월 로고를 두 개의 바 사이에 들어있는 영문 로고로 변경했고, 6~7월 들어 조흥파이낸스와 [[조흥증권]]을 코미트창업투자와 대만 KGI그룹에 각각 파는 한편, 7월 은행권 최초로 인터넷뱅킹을 실시했다. [[2000년]] 강은상호신용금고를 춘천상호신용금고에 팔고 베트남 퍼스트비나뱅크를 인수하며 '''공적 자금 수혜 대상 은행 중 유일하게 500억 원 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살아났다.''' 2001년 은행권 최초로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배드뱅크'를 설립했다. 객관적인 지표로도 독자 생존이 가능했고 정부의 매각 방침 또한 점진적인 분할 매각이었기 때문에 조흥은행은 당연히 독자 생존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2002년 여름까지만 해도 외자 유치 및 일부 계열사 해외매각 등의 계획을 세우면서 경영 안정화를 꾀하고 더 나아가 계열사를 모아 금융지주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2002년 10월 정부가 갑자기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신한 말고도 몇몇 컨소시엄이 있긴 했으나 정부는 '''합병을 통한 대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고[* 정부의 논리는 한마디로 '''전세계에 내세울만한 대형 금융기관 육성'''이었는데 문제는 은행들의 자발적인 합병을 권장하는 차원을 넘어 대놓고 정부가 합병을 강요했던 거고 이 때문에 당시 금융권 노사 갈등이 매우 극심했다. 그나마 인수한 은행에서 피인수 은행 노조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는 양보를 하면서 잠잠했던건데 만약 이 때 노사 합의가 제대로 안되었거나 이행된게 시원치 않았더라면 '''은행권 총파업'''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결국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노골적으로 밀고 나간다.[* 실사 과정에서 신한 측이 매각 대금이 너무 높다는 이의를 제기하자 정부가 상당히 당황했었다. 그러다가 내놓은 결론이 '''[[신한금융지주]]의 주식도 매각 대금으로 받겠다는 것.''' 신한금융지주에 조흥은행이 매각되면서 일부 대금은 신한금융지주 주식으로 지급되었는데 이 주식의 가치가 계속 오르면서 2011년 [[예금보험공사]]가 신한금융지주의 주식을 모두 매각한 결과 총 회수금액이 무려 '''4조 7,000억 원.''' '''공적자금 2조 7,000억 원보다 무려 2조 원을 더 회수했고, 회수율도 174%에 달한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임기 말이었던 [[김대중]]과 측근 호남 낙하산 인사들이 [[신한은행]] 주주인 [[일본]]계 자금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의혹도 일부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나, 당시 매각에 반대하던 노조의 일방적 주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사실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 전에는 해외 매각이 여의치 않았던 [[서울은행]]을 아예 [[하나은행/합병 이전|하나은행]]에 넘겨 대형화를 꾀한 일이 있긴 했다. [[파일:클릭cnb.jpg]] 당연히 조흥은행은 노사 할 것 없이 난리났었다.[* 감정 싸움의 문제도 있었다. 애초 [[신한은행]]이 개설될 무렵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가면서 생긴 앙금과 역사도 짧은 상대에게 합병당하는 것이 굴욕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간 덕분에 시스템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인포믹스라든지) 해서 전산 인프라의 통합이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 노조의 파업은 일단 사측에서 표면적으로는 만류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조흥은행에 대한 애사심은 노사 모두 한마음이었기에 인수 즉시 [[신한은행]]과 대등 합병하고 명칭을 조흥은행으로 할 것을 요구한 건 노사가 한목소리였을 정도. 이에 [[신한금융지주]] 측은 노조와의 협의를 거쳐 통합은행 명칭은 조흥으로 하되 '''통추위에서 결정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합의문을 발표하지만, 2005년 말 통추위는 저 밑줄친 부분만 갖고서 통합 은행 명칭을 [[신한은행]]으로 정해 버리며 그레이트 2단계 퓨전이 확정됐다. 창립한 지 109년 만에 소멸된 셈이었다. '''그러나 역사만은 이어졌다.''' 존속 법인을 조흥은행으로 정하는 [[역합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법인으로 따지면 신한은행이 사라지고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한 것이 되었다. 비록 [[신한금융지주]]가 조흥은행을 인수하긴 했어도, 역사성만큼은 1982년에 설립된 [[신한은행(1982년)|신한은행]]이 조흥은행에 설립연도 자체가 증손자뻘인 만큼 존속 법인은 조흥은행으로 정한 것이다. 때문에 현재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가 속속들이 다 나와 있다. 여지껏 은행 인수합병 사례 중에서는 피 인수 은행 역사가 비중 있게 다뤄진 유일한 케이스. 뿐만 아니라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재 신한은행 광교영업부에 가보면 신한은행 Since '''1897'''이라는 문구도 달아 놓았는데 이는 결국 現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의 모든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은행연합회의 순서는 산은-농협-[[조상제한서]]-국책은행 코드순-후발시중은행 코드순-지방은행 코드순으로, 법인 계승과는 상관 없이 은행 합병 시 통합은행은 통합 주체 중 더 상석인 은행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은행/합병 이전|서울은행을 계승한 기존 법인]]을 걷어차고 [[외환은행]]을 존속법인으로 정하여 통합된 [[KEB하나은행]]이 서울은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얘기가 다른데, 현재 [[신한은행]]은 창립 기념일을 애매모호하게 통합 출범일인 [[2006년]] [[4월 1일]]로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첫 은행'''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우리은행]][* 1899년 1월 30일에 창립한 대한천일은행을 계승한 게 [[한국상업은행]]이고, 이 은행이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1999년 한빛은행을 거쳐 2002년에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이어진다.]에 별다른 대응을 안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내 최초의 은행은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임이 공식적으로 인증되었으므로, [[우리은행]]의 '''우리나라 첫 은행''' 구호는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도 한편으로는 조흥은행의 역사를 어떻게든 외면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은행이 최초의 은행 구호를 내세우며 신한은행이 이에 대응을 하지 않는것도 신한은행이 역합병으로 역사를 거저먹은 격이라 최초 은행 운운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속 박물관인 한국금융사박물관의 내부 전시에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일제강점기 시대 유물까지는 ~~신한은행이 없었으니~~조흥은행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나 1980년대 이후 전시품은 거의 다 신한은행 중심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은행은 이름만 변경되었을 뿐 역합병 없이 법인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도 우리은행이 최초 구호를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