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좌(성씨) (문단 편집) == 개요 == 좌(左)씨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본관은 과거 고대 중국 행정구역 [[청주(중국)|청주]], [[제주특별자치도]] 2개가 있다. 어떤 곳을 관향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청주 좌씨, 제주 좌씨로 나누어졌고 사실상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청주는 한국의 청주가 아닌 중국의 청주이다. 2000년 인구조사로 청주를 본관으로 삼은 청주 좌씨가 2691명, 제주를 본관으로 삼은 제주 좌씨가 436명이 있다. 2015인구 기준 좌씨는 총 3378명이며 전국 시,도 단위로는 제주도에 1948명, 서울특별시에 457명, 경기도에 384명 순으로 많고 대구광역시가 12명으로 가장 적다. 좌씨는 중국 [[노나라|노(魯)나라]] 학자 [[좌구명]]에게서 비롯된 성씨라고 하며, 우리나라에 좌씨가 들어오게 된 것은 1273년(고려 [[원종]] 14)으로 여원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한 후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 [[몽골 제국]]에 귀속시키고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로 목마장을 설치하여 명마를 사육하면서부터 이다. 이때, [[원나라]]의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있던 좌형소(左亨蘇)는 [[고려]]가 원에 복속된 후 제주도에 목마장이 설치되자 감목관으로 파견되어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 입도(入島),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좌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좌형소는 생전에 가족들에게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둥성]] [[청주(중국)|청주(靑州: 칭저우)]]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 바 있어 이후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게 된 것이라 한다. 이후 제주는 [[탐라총관부]]가 폐지되어 고려에 반환된 후에도 감목관 및 목호들의 지배하에 있다가 [[최영]] 장군이 1374년([[공민왕]] 23) 8월 [[목호의 난]]을 진압한 후 고려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시조 좌형소 이후 6대 동안 감목관을 세습하던 좌씨들은 이때에 이르러 6세손 좌한기(左漢棄)가 비로소 감목관직을 고려에 반납하면서 완전히 귀화하였고, 동시에 한동안 정착 생활을 하던 구좌읍 한동리를 떠나 지금의 한경면 두모리로 이주하여 고려인으로서의 생활 기반을 잡았다. 이 때문에 현재에도 한경면에 좌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현재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서북부 일대에 좌가장(左哥場)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 지역이 당시 좌씨 소유의 땅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역에 좌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7251&cid=51955&categoryId=55507|디지털제주문화대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