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좌우합작운동 (문단 편집) === 좌우의 반발과 실패 === ||[[파일:/pds/201003/12/75/f0020275_4b9a4c3dc5034.jpg|width=100%]]|| ||1946년 10월 28일 <제 3특보>에 실린 좌우합작 시사만평. 극좌 세력([[조선공산당|공산당]])과 극우 세력([[한국민주당|한민당]])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왼쪽은 [[여운형]], 오른쪽은 [[김규식]].|| [[김성수(1891)|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은 자신들이 기반으로 하는 지주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제3조(토지개혁)과 제4조(친일파 청산)에 반대했다. '''이들은 좌우합작운동이 결국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적화논리라고 강경하게 비난했다.'''[*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적화될 거라는 등의 논리는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언론인 [[뉴데일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09/08/13/ART31835.html|#]]] 더 강경한 자세로 비판한 쪽은 좌익 계열이었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초기에는 여운형과 좌우합작에 호의적이었으며 1946년 초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주기 추모식에도 참가하기도 했으나 1946년 5월 미군정이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키면서 [[공산주의]] 계열 탄압을 본격화하자 비타협적으로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월북]] 후 좌우합작노선을 완벽하게 부정했으며 8월에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에 심어둔 프락치를 활용해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합당을 결의시켰다. 이에 여운형은 8월 미군정에게 박헌영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박헌영은 중도파 세력들을 '미군정과 연탁한 기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서 비판했다. '''좌우합작운동은 [[미국 제국주의|미제]]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추진된 것이고 좌익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미제의 술책이라는 논리였다.''' 박헌영은 좌우합작 7원칙 역시 무상몰수가 아니기 때문에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고 미소공위 역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어긋난다며 극렬히 반대했다. 박헌영이 기획한 합당 정당은 그해 12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으로 결성되었다.[* 남로당은 합법 정당으로 인정되었으니 박헌영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상황을 반전시키고 미군정의 탄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전후조선처리방안인 과도입법기구안을 보면 좌우합작이 공산당 계열 고립화 정책인 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 >과도입법기구안[[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71704036&referrerCode=0&searchKeyword=%EA%B3%A0%EB%A6%BD%ED%99%94|#]]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물론 이런 와중에도 미군정의 중도 지원 행보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946년 12월 12일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를 말한다. 민선 45명·관선([[미군정]] 선발) 45명으로 선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대 총선|제헌국회 총선]] 이후 9일째 되는 날인 1948년 5월 19일 과도정부법률 제12호에 의하여 해산하였다.]이 구성되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하곡수집법>·<미성년자노동보호법>·<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어서 미군정은 1947년 1월에는 반탁세력에게 운동을 중지하고 미소공위 참여를 권고했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과 한민당 등 좌우 세력들의 반대·불참으로 1947년 3월 미군정청의 간접적인 지원 방침이 잠정 철회되었고 좌우합작운동은 이후 중도세력들만의 운동으로 축소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시작되었고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다시 창당하면서 재기를 꾀했지만 중도파의 몰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7월 19일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이자 중도파 세력들의 중심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을 계기로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수차례 극우 세력과 극좌 세력으로부터 테러와 위협을 당하고 있었으며 여운형도 수차례의 암살 기도를 피한 상황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에는 여러 배후가 추정되나 확실한 건 극우(한민당)과 극좌([[남조선로동당|남로당]]) 모두 그의 장례에 의례적인 조의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다시 한 번 기회를 엿보던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으면서 결정타를 맞이했다. 당일 여운형은 미국의 민정관 E.A.J. 존슨과 만나면서 그의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신뢰를 얻고자 했으며 존슨은 그를 안재홍의 후임 민정장관(국무총리격)으로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중도파와 온건 좌파를 끌어안고 [[이승만]] 등 미소공위에 반대하는 우익들을 제어하고자 했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언론플레이]]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에 미군정은 차라리 자신들에 우호적인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삼고 임시정부 수립을 앞당기면서 [[차관]]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로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여운형]] 문서 참고. 곧이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 버리면서 미국이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게 되었다. 이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나게 되고 38선 이남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1947년 12월 10일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 해체되어 실패로 끝났다. ||[[파일:/pds/201002/23/75/f0020275_4b83a427550a9.jpg|width=100%]]|| ||좌우합작위원회 해체일에 촬영한 사진. 여운형이 그 해 7월에 암살당하자 김규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운형 얼굴을 오려 맨 우측에 붙여 놓았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취지는 [[김구]]와 김규식을 통해 1948년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남북분단을 막아내지는 못한다. [[분류:1946년/사건사고]][[분류:1947년/사건사고]][[분류:사회 운동]][[분류:미군정/사건 사고]][[분류:여운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