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좌파공산주의 (문단 편집) == 역사 == 좌파공산주의는 그 이론적 특징이 아나키즘과 같으므로, [[20세기]] 초중반에는,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 내전]] 당시 POUM(통일마르크스주의노동자당)과 [[CNT]]-FAI간의 연대가 대표적이다. 공산주의 국가의 총본산인 소련에서는 레닌의 전위당론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가 기계론자라고 욕을 대차게 먹은 [[니콜라이 부하린]]이 좌파공산주의에 가까운 인사였다.[* 정작 소련 내 노동계급의 대표자들과 몇몇 비볼셰비키 좌파인사들은 트로츠키를 지지했는데, 이는 아래에 언급되는 좌파공산주의의 '노동조합의 인정' 문제 때문이다. 부하린은 소농과 노동자 계급을 중시하긴 했지만, 다른 좌파공산주의자들처럼 노동조합의 처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을 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경제정책을 진행하며 오히려 노조의 힘을 빼버리기도 하였다.] 물론 좌익 공산주의와 사회적 아나키즘은 다른 부류인 만큼 이 둘또한 다른 점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의 대한 의견이였다. 좌익 공산주의는 [[노동조합]]을 부르주아들의 도구로 여기며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행동할 것이고 보수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같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자와 유사했다. 말라테스타 역시 1907년 국제 아나키스트 회의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을 상대로 이러한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아나키즘은 노동조합을 사회혁명의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같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자는 생디칼리슴을 아나키즘 혁명의 주요 도구로 봤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조합을 아예 적극적으로 정치체제로 끌고왔다.] 진짜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에는 좌파공산주의자가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참 이후의 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본래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볼셰비키)에는 레닌의 친구이자 지식인, 작가인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중심으로 한 좌파공산주의와 유사한 세력인 '초좌익 분파'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한참 전인 1909년 일찍이 레닌에 의해 토사구팽당해 출당되었고[* 이들은 1905년 혁명 이후 만들어진 러시아 두마에서 사회민주노동당 의원들(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둘 다 있었다였다)이 당선된 것을 질색하며 당장 의원들이 사임하거나 어떠한 합법적 활동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일시적으로 '페료트'(Вперёд, 전진)이라는 독자세력을 만들어 활동하였으나 곧 1912년에 소멸하였다. 이들의 핵심 구성원이 바로 [[막심 고리키]]. 한편 보그다노프의 제자가 바로 아래에서 언급되는 [[니콜라이 부하린]]이었다. 이들은 10월 혁명 이후 잠깐 3년 정도 '프롤레트쿨트'라는 예술가 공동체를 중심으로 부활하나, 레닌과 제르진스키가 이들이 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직접 때려잡아 해산시켜버렸다. 이들 중 소련 정권 지도부에 남은 최후의 생존자는 니콜라이 부하린이 아닌 교육인민위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인데, 부르주아 문화 대신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등 급진적 사고방식을 보이긴 했으나 교육 분야 외에는 족적을 남긴 게 없다. 보그다노프는 10월 혁명 이후 레닌 정권을 '군사독재 정권'이라며 비판하며 복당을 거부했다. 이후 별도로 가브릴 미야스니코프라는 좌파공산주의자가 활동했는데, 레닌 시대에 유일하게 출당당한 명망높은 볼셰비키 중 하나로 농민 경제의 회복, 언론의 자유, 당 중심의 독재 해체 등을 주장했지만 콜론타이를 비롯한 노동자 반대파가 주장하는 노동조합의 공장 관리에는 철저히 반대하였다. 이후 독일로 이동하여 룩셈부르크 사후 형성된 독일의 좌파공산주의 정당인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창립과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후일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 비판하였다. 골 때리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부하린주의, 그리고 스탈린주의를 둘러싼 좌파공산주의의 대립이다. 레닌 생전과 1920년대까지만 해도 좌파공산주의는 룩셈부르크 사후 주도권을 잃어가며 레닌주의를 명백히 적대하였다. 하지만 그 중 최악의 산물인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고, 트로츠키주의와 부하린주의 모두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며[* 다만 [[트로츠키]]가 러시아에 있을당시만 해도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구분은 거의 무의미했을 정도였다, 특히 산업부분에선 둘이 통하는게 많았고 그 외의 부분은 오히려 트로츠키가 더더욱 군국주의자로 보일정도였는데, 그 중 압권이 바로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와 레닌간의 논쟁에서 트로츠키가 노동조합을 군사조직화 하자던 애기였다, 그래서 의의로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 망명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갈아타기도 했다. 이 중의 대표가 부하린과 함께 젊은 공산당원을 대표하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이다.] 자신들만의 '온건함'을 찾았다. 이때 레닌주의가 아니라는 비난까지 받았던 부하린주의, 즉 당이 아닌 대중 중심을 추구하는 사상인 국제공산주의 '''우파'''는 좌파공산주의가 되었고[* 즉 소련내 좌우와 국제공산주의 좌우가 엉망진창으로 섞여있다는 의미이며, 룩셈부르크주의는 본디 소련에선 부하린주의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10월 혁명 직후 얼마간은 부하린도 '''좌파공산주의자'''로 불렸고, 트로츠키보다 더 강경하게 세계혁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다만 [[부하린]]이 [[NEP]] 이후로 강경적이였던 면을 내려놓고 [[일국사회주의]]와 [[부농]]지원에 초점을 맞추며 우익화되었으며, 실제로도 부하린주의는 이러한 면 때문에 현재에는 [[트로츠키주의]]보다도 세력이 없을 정도로 일소되었다. 위에 언급된 부하린의 스승 보그다노프와 소련 내 좌파공산주의 파벌은 실제로 NEP의 도입을 소련의 자본주의화라 부르며 매우 경계하였고 비판하였지만 곧 죄다 수감되고 만다.] 트로츠키주의는 평의회 민주주의[* 다만 이것도 [[스페인 내전]] 당시의 이야기지 스페인 내전 전과 그 후에는 일관되게 전위당과 직업적 혁명가를 중심으로 한 레닌주의적 중앙집권 독재를 지지했다. 스페인 내전에는 [[인민전선]]의 지지를 위해서 일시적으로 평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 트로츠키 본인도 비볼셰비키 좌파와의 연맹이니 소비에트 민주주의니 하는 걸 언급한 건 사실인데 이사람은 전위당과 중앙집권을 부정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1936년 헌법으로 소련의 소비에트를 아예 직선제의회로 바꿔버리자 그것에 반대하며 '레닌주의 식'의 소비에트 통치를 주장한 것인데, 이건 그냥 통제받는 형식상의 민주주의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애초에 소비에트 러시아도 초기에는 멘셰비키 국제파의 소비에트 출마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내각참여를 보장하는 제한적 다당제 정권이었다.]를 주장하면서 다른 계열로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 이념간의 사이는 '약간' 완화되었고, 스페인 내전을 앞두고 대망의 합작이 이뤄진다. 바로 트로츠키주의 세력인 '스페인 좌파공산주의'[* 다만 초기에만 트로츠키주의였고 내전 당시에는 트로츠키를 버리고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바꿨다.][* 이름은 좌파공산주의인데 트로츠키주의 세력이다. 즉 국제공산주의 '''좌파'''는 트로츠키주의이다. 골때리지만, 1920년대 초반 볼셰비키의 수괴로 비판받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등장하고 나서 알고보니 천사였다는 취급을 받았고, 소련내 아나키스트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 좌파공산주의자들은 죄다 트로츠키를 지지했다. 대표적인 인사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콜론타이 본인 또한 본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 [[트로츠키]]의 크론쉬타트 수병 강경진압 및 코민테른 대회에서의 면모에 반대하며 노동자 반대파로서 트로츠키를 적극 비판하였고 바로 그 노동조합 논쟁 때 당에서 출당까지 될 뻔하는 수모를 겪으며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해 완전히 실각되어 정치적 영향력도 사라진건 상태였지만, 1920년대 중후반 이후로 우경화된 부하린과 본색을 드러내는 스탈린 앞에선 과거의 적인 트로츠키를 '차악'으로써 지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노동조합의 주도권을 거부하는 부하린, 본색을 드러낸 스탈린과 손을 잡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와 부하린주의 세력인 '노농연합'이 단결하여 위에 언급된 통일맑스주의노동자당, 즉 POUM을 창설한 것이다. 트로츠키 본인은 이 연합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이 양반은 항상 비난과 조롱을 해댔지 상대방을 매장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자기가 진압했던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의 생존자들(좌파공산주의)에게서 지지받는 촌극까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을 비판하면 죽여버리는 스탈린보다야, 자신을 비판하면 인신공격을 하는 트로츠키가 천사였을 것이다.] 여기서 더욱 산으로 가는 것은 [[POUM]]을 탄압한 소련의 바르셀로나 총영사인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이다. 한때 트로츠키의 심복 중 한명이자 붉은 군대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네스토르 마흐노]]와 적군의 연합을 주선했던 안토노프옵세옌코는 이 시기 스탈린의 충신으로 돌아서, [[NKVD]]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파견되어 POUM 당원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만행을 전두지휘하였다.[* NKVD가 어찌나 많은 좌익,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들을 살해했는지, 자신들도 철두철미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돌로레스 이바루리나 호세 디아스 등의 스페인 공산당 지도부가 NKVD로부터 죽임당할 뻔한 사람을 빼돌리고 구해주는 일까지 있었으며, 소련 고문단이 철수할 때는 스페인 공산당도 안도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그 자신조차 [[대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총살당하고 만다. 그 촌극을 전해들은 트로츠키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물론 말했듯이 안토노프옵세옌코 말고도 수많은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이 산업 등의 면에서 통하는 [[스탈린주의]]로 갈아탄 일이 워낙 많기도 했다, 애초에 [[스페인 내전]] 당시와 지금의 [[트로츠키주의]]는 사실 [[트로츠키]]의 [[트로츠키주의]]가 아니라 애초에 [[트로츠키주의]]랑 다른 결인 [[신트로츠키주의]]이기에 오히려 [[트로츠키]]랑 다른 면이 상당히 존재한다.[* 트로츠키 본인 또한 애초에 1920년대 초반에는 대놓고 군사독재자처럼 굴다가, 권력에서 한참 멀어지고 난 뒤 '당내민주주의'를 밀고나가며 기존 자신의 반대파들과 손을 잡으며 성향을 바꾸었다. 그 정점이 노동계급의 다당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1936년 저작인 '배반당한 혁명'이다. 물론 트로츠키는 성향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바뀌었던 그걸 펼쳐보일 권력도 없었으며, 대숙청으로 모든 지지기반이 날아간데다 자신마저도 스탈린에 의해 암살당하며 그 바뀐 성향을 반영한 새로운 사상 또한 완성하지 못했다. 현대의 트로츠키주의는 이로 인해 '정통'이라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 계열과 토니 클리프를 중심으로 한 신트로츠키주의로 나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