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나라 (문단 편집) == 성립 시기 == 역사서 《[[사기(역사책)|사기]]》에 따르면, [[사마천]]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기원전 841년에 주목했던 이유는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주)|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828년까지는 [[공백화]]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덩달아 이 혼란의 시대에 많은 귀중한 사료들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를 알 길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공화]]시대'''(共和時代)라고 칭한다.[* 이 공화시대는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오늘날에는 Republic([[공화국]]), Republicanism([[공화주의]])을 번역하는 낱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공화'라는 말이 공백화의 이름으로 해석되지 않고 여러 신하가 '함께'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았고 《사기》에 <12 제후 연표>를 세웠는데, 이 시점부터 연대에 따른 기록은 상세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다. 한편 문헌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발굴의 성과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상나라 및 주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가 기록된 [[청동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문자로 구성된 기록과 더불어 그 당시 관측되었던 천문 현상도 함께 병기되어 있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록된 천문현상의 날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중국 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찌른 연도(무왕극상년)를 추정하고자 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여러 신빙성있는 학설들은 기원전 1100년대를 집중적으로 지목하나, 다른 연대를 추정하는 학설들도 여럿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위키백과에서도 각문서에 나온 연도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하여 주나라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46년으로 산정하였으나, '무왕극상년' 외에도 주나라 왕들의 재위 기간에 대한 추정은 쇼우네시 등 구미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맞지 않으므로 공정에 참여한 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인 학자들 그리고 서양 학자들 간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상은 심재훈, <"발을 잘라 신발에 맞추기" - 하상주 단대공정, 서주 기년의 허와 실> 《하상주 단대공정 - 중국 고대 문명 연구의 허와 실》, (동북아 역사재단)에 따랐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적어도 [[조선시대]] 이후부터)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00년 앞뒤 정도로 여겼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기인된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교과서에서도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세기 초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미 한국인 사학자 방선주는 기원전 1030년을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