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나라 (문단 편집) === [[전국시대]] === 주나라의 질서가 소실되자 다들 제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자 다투었던 시기. 우선 전국시대가 시작된 것 자체가 [[진(춘추오패)|진(晉)나라]]가 [[한(전국시대)|한나라]], [[위(전국시대)|위나라]], [[조(전국시대)|조나라]]의 세 나라로 쪼개진 것으로 산정된다. 기원전 453년 일어난 이 '삼진분립'에 대하여 주 천자는 50년간 손을 쓰지 못하다가 기원전 403년에 들어 결국 희진의 붕괴와 세 나라의 건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국의 폐지와 건립을 명령하는 역할이 주나라 천자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시사하였으므로, 주나라의 완전한 무력화를 의미했다. 이후 각국은 서로를 힘 닿는 대로 병탄하며 '''부국강병'''을 추진했으며, 전투의 양상도 귀족들만의 [[전차]]전을 넘어 더욱 더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으므로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집단 지배 체제를 넘어 인민에 대한 개별적 지배(와 이를 통한 [[백병전]])의 필요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군현제는 초나라와 같이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제후국을 병탄한 뒤, 낯설은 주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나서 대신 도입한 통치 체제에서 유래한 새로운 통치 제도로 여겨지는데, 기원전 4세기 [[법가]]가 주도한 '''변법'''(變法)을 통하여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한편 정전제가 실존했다면, 봉건제는 집단 지배 체제에서 개별적 인민 지배 체제로 이행되었던 이 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주나라의 질서를 아예 뿌리 뽑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주나라는 완전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당연히 스스로의 질서에 가장 강고하게 매달려야 했던 주나라는 변법을 주도하고 여러 국들을 병탄할 수 없었다. 한때 주나라 군주가 신적인 '''제'''(帝)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것은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가 제(帝)를 자칭했다가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지탄을 받자, 제나라가 명목상으로 '동제'(東帝)로 불리고, 주나라는 '서제'(西帝)로 불리도록 각국의 정상들에게 제시하였던 타협안의 결과였을 뿐, 주나라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상적으로 주나라의 약화를 잘 증빙하는 예는 바로 [[유가(제자백가)|유가]]의 태도 변화다. 주나라 질서의 회복을 부르짖고 제후들을 지적하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주 천자를 포기하고 각국의 왕과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천자를 간절히 요구하였다. 즉, 주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질서의 회복은 [[일장춘몽|어제 낮잠에서 꾸었던 봄날의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주의 복원이기는 하였지만, 유가가 주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한 것은 주의 위상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잘 시사한다. 설상가상으로 주나라 안에서는 왕위를 놓고 형제간에 분쟁이 자주 벌어졌고, 형을 죽이고 즉위한 주나라 고왕은 더 이상의 계승 분쟁을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기원전 440년 동생을 '서주공'으로 임명했고, 작은 아들을 '동주공'으로 임명하여 그러잖아도 작은 주나라는 '서주공'과 '동주공'이 나눠서 다스리는 영역으로 분할되었고, 주나라 왕위를 계승하는 주왕실은 서주공의 영지에 얹혀사는 기괴한 체제가 되었다. 서주니 동주니 하는 호칭은 국명 자체가 주나라인 나라를 시대별로 구분하기 위해 일컫는 호칭이지만, 이 나라들은 국명 자체가 '서주'와 '동주'였다. 아예 난왕 때는 서주공국과 동주공국이 서로 싸우기까지 한 게 비극. 이렇게 되었으니 '''[[전국칠웅]]''' 역시 이들에 대한 존경은커녕 멸시하고 이용하려고만 했다. 역시 난왕 치세에 [[한(전국시대)|한나라]]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동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려 했다. 이를 막을 힘도 없던 주나라는 두려움에 떨었는데 이때 주나라를 섬기던 소대라는 신하가 한나라의 상국 공중을 찾아가 이들을 설득하여 징발을 중단하고 역으로 고도[* 지금의 [[산서성]] 진성현 고도촌] 땅까지 얻어오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공중은 소대를 만나 그의 제안을 듣자 '''"아니 징발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내가 왜 거기에 땅을 줘야 함?"''' 이란 반응을 보였다. 이에 소대는 고도를 주나라에 주면 주나라는 한나라에 의지할 것이고, 진나라는 주나라에 내왕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피폐한 고도 땅 하나로 빈틈없는 주나라를 얻게 되는 셈이라 설득했고, 공중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고도 땅을 주나라에게 줬다. 결국 주나라는 한나라로부터 땅을 얻어올 수 있었지만, 이는 명색이 제후들의 위인 주나라가 제후들에게 섬김을 받기는커녕 전국칠웅 중 최약체였던 한나라한테까지 멸시당하고 물자를 바쳐야 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이후 이들은 [[진(영성)|진나라]][* 전국시대 초기에는 주나라 바로 옆인 위나라와 한나라가 주나라를 핍박하는 걸 진나라가 구해주기도 했고 회맹을 주도하기도 하여 주나라가 직접 마지막 방백으로 인정해주는 등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진효공]] 이후 전국칠웅들이 죄다 왕을 자칭하게 되고 여기에 진나라가 강대해져 다른 전국칠웅들을 밀어내면서 주나라 왕을 본국으로 일방적으로 소환하려 하기까지 하니 주나라에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한나라, [[위(전국시대)|위나라]]에 빌붙으며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서주는 [[진(영성)|진나라]]의 [[소양왕]]에게 망했고, 이때 [[구정]]을 빼앗김과 함께 주 왕실과 서주 공실은 소멸하였다. 보기에 따라선 주나라는 소양왕 때 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주 공실은 존속하였으나 더 이상 '주왕'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 이후 동주공국까지 [[장양왕]]에게 공격 받아 망하면서, 주나라는 아예 제사조차도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일어서고 90여 년 뒤에 천자가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서 그 땅을 주어 다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