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대환 (문단 편집) == 생애 == 1954년 6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화천리에서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근무지 이동으로 칠북초등학교, [[가야초등학교(함안)|함안 가야초등학교]], [[회원초등학교]] 등 3곳의 학교를 전전했으며, 아버지가 [[칠원고등학교|칠원농업고등학교]](現 [[칠원고등학교]])에서 [[창신고등학교]]로 전근가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최종적으로 [[성호초등학교]]에 전학했다. 성호초등학교, 마산중학교(19회), [[마산고등학교]](32회), 1985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s-4.13|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과 종교학 전공]][* 現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73학번)를 졸업하였다. 1973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한 이후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9년 [[부마민주항쟁]] 등으로 구속되었다.[* 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961|미디어스 기사]]] [[노회찬]] 등과 함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9월 29일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413458|회사의 노동자 정당 건설 전략에 재고를 요청함]]'(통칭 '신노선')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는데, 이 문건은 [[인민노련]]이 지하조직운동을 청산하고 합법적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92년 [[노회찬]] 등과 함께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약칭 한국노동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68912]].] 한국노동당 창준위는 김문수, 이우재가 주도하던 [[민중당(1990년)|민중당]]에 합류하여 통합민중당이 되었으나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자동해산되었다. 1995년 노회찬과 함께 [[개혁신당(1995년)|개혁신당]]에 입당해서 창원 을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마산갑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2002년 5월 [[사회당(1998년)|사회당]] [[최혁]] 부대표와 비밀리에 통합 협상을 진행중이었음을 밝혔다. 이 협상안은 민주노동당 중앙에 보고되었으나 상부로부터 묵살당했다고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5212|기사]] 2002년 8월 [[김호일]]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하여 치러진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선거구)|마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정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선거구)|마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정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6월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정책위의장 선거 토론회 도중, [[경기동부]] 계열 이용대 후보에게 북한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여 당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3455|관련 기사]] 2006년 민주노동당 당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 [[문성현(정치인)|문성현]]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문성현은 원래 심상정과 함께 활동하던 [[PD(정파)]] 출신이지만, 이 선거에서는 마땅한 당대표 후보가 없던 [[NL(정파)|NL]]계열의 몰표를 받고 당선되었다. 이후 사실상 [[바지사장]]으로 전락한다.] 2008년 3월 24일, [[심상정]] 비대위의 종북주의 청산 주장을 NL계열이 거부하면서 평등파가 집단적으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는 분당 사태가 벌어지자 주대환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20243]]] 다만 다른 [[평등파]]들과는 달리 [[진보신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선거구)|마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주영(정치인)|이주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1월 27일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출처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0253]]]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창원시 성산구(선거구)|창원시 성산구]]([[권영길]] 의원 지역구)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선을 치뤘지만 탈락했다. 대선경선 당시 [[손학규]] 캠프에 소속된 경력도 있다.[* 당시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자 손학규 캠프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출신의 좌파운동가들을 대거 영입해서 대단히 진보적인 정책공약을 만들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도 이들이 만든 것이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이 될 때까지 당적을 유지하다가 2015년 [[사회민주당(2017년)|사회민주당]]을 창당하기 위해 탈당하였다. 하지만 이후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으로 합류했고 이후 [[바른정당]]과 합당한 후에는 [[바른미래당]]에 있었다. 이후 2019년 6월부터 플랫폼 자유와 공화 공동의장을 맡았다. [[2019년]] [[6월 28일]] 혁신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http://bareunmirae.kr/kr/news/briefing.php?bgu=view&idx=15012|#]], 14일 만인 [[7월 11일]] 전격 사퇴하였다.[[https://www.yna.co.kr/view/AKR20190711104800001|#]] [[손학규]] 대표의 지명으로 임용되었는데, [[바른미래당]] 혁신위원회에서 바른정당계와 안철수계의 연합으로 당권파의 반대를 '''5대 4'''[* [[바른미래당]] [[최고위원]]회 구성이랑 같다. 최고위원회는 [[바른정당]]계 4(하태경, 권은희, 이준석, 오신환), [[안철수]]계 1(김수민)와 당권파(손학규, 문병호, 주승용, 채이배)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꺾고 [[손학규]] 대표체제의 퇴진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의결하였기 때문이다. 주대환 혁신위원장은 반대표를 던졌으나 안건 통과를 막지 못했다. 이후 [[미래통합당]] [[김소연(정치인)|김소연]] 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을 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