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룽지 (문단 편집) === 출세가도 ===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자, 얼마 안가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했고 주룽지도 복권되어 다시 한번 중앙 정부로 복귀한다. 이어 석유부에서 일하고 당원 자격도 복귀되었다. 이어 계속 능력을 보여서 1980년대에는 국가 경제 위원회의 부의장에 임명된다. 1985년 [[자오쯔양]] 총리의 발탁으로 [[덩샤오핑]](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이외에는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 앞에서 경제보고를 했는데, 이때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주룽지에 대한 덩샤오핑의 신임은 대단해 그가 부총리직에 있던 시절 확고한 개혁파라고 칭찬하면서 이런 인재가 한직(...)에 머물고 있다고 타박했던 적이 있다.] 주룽지는 사실 대권과는 거리가 먼 중앙부처 공무원을 계속 역임하고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대권을 장악하려면 지방의 행정수장으로 일하면서 행정능력을 보여야 하지만, 주룽지는 중앙부처에서 관료생활만 계속 한 것이다. 그런데 인재 보는 눈이 좋았던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오면서 출세코스로 진입하여 1987년 [[상하이]] 시장에 임명, 1987년 10월, 중국공산당 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된다. 이 때 상하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상하이 당서기인 장쩌민을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의기투합하여 [[상하이방]]이라는 계파를 구성한다.[* 다만 장쩌민의 직계라기보다는 장쩌민과 함께 연립계파를 구성했다고 봐야 한다. 시진핑 이전의 중국에서는 무조건 총리가 총서기/주석의 아랫사람이라고 볼 수 없기도 했고... 정치적 기반으로 상하이를 공유하지만, 철저히 자기 계파만을 챙겼던 장쩌민과는 달리 공청단 출신인 [[원자바오]]를 자신의 후임 총리로 밀고 자신과 함께 인민은행에서 일했고 나중에 상하이방을 탈탈 털어버리는 [[왕치산]]을 후원하는 등 기술관료를 대표하는 중립파로도 분류할 수 있다.] 장쩌민의 후임으로 1988년 상하이시 서기에 임명되었고, 개혁 개방을 지휘하여 상하이 지역의 경제 개발을 지휘한다. 이때 엄청한 부정부패 단속과 관리들의 기율 단속으로 제2의 [[임칙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당시 주룽지는 상하이에 재직하면서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도시 인프라(교통, 통신, 상하수도, 재건축 등등)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현재 [[마천루]] 숲을 이루는 상하이의 기반은 모두 주룽지가 닦은 셈이다. 1989년 베이징에서 벌어진 [[천안문 6.4 항쟁]]의 강경 진압과는 달리, 상하이의 소요 사태는 주룽지가 앞장서서 평화롭게 해결하여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천안문 항쟁을 전후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낙점해두었던 후야오방은 심장병으로 급사, 자오쯔양은 완전히 실각하면서, ~~3번타자인~~ 장쩌민이 [[서기장|총서기]]에 등극하고, 결국 대권을 쥐게 된다. 상하이 시장으로 업적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국무원 상무부총리,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원래는 경제개혁에 회의적이던 원조 태자당 [[리펑]]이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주룽지의 개혁 드라이브에도 제약이 걸릴 상황이었으나, 리펑이 점차 힘을 확대해나가던 상하이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심장마비까지 겹쳐 국무원 내 실권은 상무부총리 주룽지에게 돌아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