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병덕 (문단 편집) == 생애 == [[1936년]] [[11월 5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와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보통고시(현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해 [[순경]]에 임관하면서 [[경찰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72년 [[총경]]에 진급했고, 진급 후 1972년 6월 19일부터 1973년 2월 12일까지 [[https://www.gwpolice.go.kr/hs/sub06/sub06_03.jsp|제26대]] [[횡성경찰서]]장, 1973년 2월 12일부터 1973년 12월 23일까지 [[https://www.gwpolice.go.kr/hwachun/sub06/sub06_03.jsp|제23대]] [[화천경찰서]]장, 1975년 6월 28일부터 1976년 4월 10일까지 [[https://www.djpolice.go.kr/?m_idx=05050700|제31대]] [[대전서부경찰서]]장, 1977년 8월 13일부터 1979년 2월 20일까지 [[https://www.smpa.go.kr/user/nd50024.do|제9대]] [[서울서부경찰서]]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 [[경무관]] 진급 후에는 [[대한민국 경찰청|내무부 치안본부]]에서 기획감사과장, 정보2과장 등을 지냈고, 1983년 [[충청남도경찰청|충청남도경찰국]]장을 [[https://www.hankyung.com/article/1990031400451|거쳐]] 내무부 치안본부 제4차장을 지냈다. 1987년 1월 22일부터 1988년 5월 31일까지 [[https://www.kcg.go.kr/direct/si/sub/info.do?page=2749&mi=2749|제26대]] [[해양경찰청장|해양경찰대장]], 1988년 6월 1일부터 1989년 2월 28일까지 [[https://knpo.police.ac.kr/police/police/html/intro/chefHistory.do|제11대]] [[경찰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1989년 4월부터 1990년 3월까지 [[감사원]] [[감사위원]], 1990년 3월부터 1990년 9월까지 [[https://www.chungbuk.go.kr/governor/contents.do?key=749|제24대]] [[충청북도지사]](관선)를 지냈다. 1993년에는 [[경찰위원회]] 상임위원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99335#home|지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96년 1월 탈당했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원종(1942)|이원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재미있게도 이원종 역시 주병덕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97년 12월 초 [[한나라당]]에 입당했다가 대선 패배 직후 탈당하여 3개월 후인 1998년 3월 자민련에 입당한 케이스였는데, 심지어 4년 후인 2002년 3월에는 다시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다만 주병덕이 탈당한 직후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 지역 8석 가운데 자민련 5 / 신한국 2 / 무소속 1로 자민련이 승리했고, 이는 과거 [[신민주공화당]]이 고작 2석밖에 못 얻는 것도 모자라 [[제천시]]와 [[제원군]]-[[단양군]] 2곳에서 [[통일민주당]]에 밀려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겪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를 완벽하게 설욕한 것이었다. 게다가 [[1997년]] 대선 정국은 [[DJP 연합]]에 힘입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근소하게 앞선 상황인지라 결코 한나라당의 정권 재창출을 확신할 수 없었는데도 기어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가 자민련을 선택한 이원종에 밀려버린 것.] [[2002년]] 4월에는 재선을 준비하던 [[1998년]] 3월에 3천만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검찰에 시인했고, 8월에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되면서 불명예스럽게 정계를 은퇴하게 되었다. [[2020년]] [[5월 22일]] 숙환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