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세죽 (문단 편집) == 소련에서의 삶과 죽음 == 1937년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대숙청]]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193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 5년간 복역하였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비탈리는 1~2살 무렵, 주세죽이 유형 생활을 할 때 사망했다. [[카자흐스탄]] 지역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북한으로 귀국하게 허락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전남편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이 되었고, 1946년 7월에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딸 박비비안나를 만났으나 주세죽과는 만나지 않았으며, 1949년 8월에 자신의 비서였던 윤 레나와 재혼했다. 1953년, 병든 몸으로 딸 비비안나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던 중에 기차에서 병이 악화되어 모스크바 도착 후에 사망하였다. 건강이 안 좋은데 무리해가면서 딸에게 간 이유는, 전남편 박헌영이 북한에서 구속([[김일성]]의 정치숙청)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련 정부가 박헌영의 핏줄이기도 한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개방정책을 펼친 1990년대에 기밀 해제된 소련 정부의 문서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정부는 박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송환할 계획이 없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이란 혐의로 체포하여 기소했지만, 소련은 김일성이 권력투쟁 차원에서 박헌영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박헌영의 딸을 숙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1953년 당시 주세죽은 이런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딸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딸은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온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난 상태라,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 당시 소련의 교통, 통신 상황이 열악해서 딸에게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딸을 만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