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체사상/역사 (문단 편집) == 창립기(1955~1970) == [[북한]]은 주체사상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이 창시하여, 1930년 6월 30일, 만주 카륜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 에서 김일성이 제출한 <조선혁명의 진로>를 통해 처음 발표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훗날 [[김정일]]은 1982년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김일성이 '고루한 민족주의자, 행세식 맑스주의자,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에 맞서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조선혁명의 진로>는 1978년에서야 원문이 공개되었기에 실제로 1930년에 집필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또한 다른 자료들과 교차 검증되지 않으므로, 이것은 일반적으로 북한 정권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치켜세우기 위해 자행한 수많은 역사왜곡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김일성이 만주에서 훗날 주체사상의 문제의식들과 담론들을 이룰 만한 중요한 경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 1931년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40년 소련으로 이동하여 스탈린주의적 맑스-레닌주의를 교육받았다. 이 시기 경험은 주체사상에 뿌리 깊게 녹아 있는 스탈린주의, 마오쩌둥주의적 요소들을 김일성이 학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김일성은 소련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에 옹립되었으며, 정치적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차차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행세하였으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소집하여 스탈린의 1인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역사적인 연설 <개인 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일성 역시 소련의 새 노선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 자신의 개인숭배에 대해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김일성은 근본적으로 지도노선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 시기 김일성은 가중되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연안파,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55년 12월, 김일성은 당 선전선동 일군들을 소집하여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한다. 문제의 연설문은 10년이 지난 1965년, 신진균이 근로자 1965년 10월호에 실은 논문 <주체사상은 공산주의적 자주, 자립의 사상이다>로 그 의의가 규정되었다는 점 때문에 와다 하루키 등은 해당 연설에 대해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1955년 12월 주체연설은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중국혁명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맑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하는 것은 다 우리 혁명을 옳게 수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 >김일성,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여기에는 1955년 12월, 티토의 자주노선 선언, 1956년 6월 포즈난 사건,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의 굵직한 국외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8월 종파사건의 배경과 반 김일성 그룹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분명한 점은 8월 종파사건 당시 중국과 소련은 매우 강도 높은 내정간섭을 행했고, 김일성은 이를 매우 큰 치욕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58년까지 당, 군에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면서 국내의 소련, 중국 영향력을 제거하면서 독자노선을 확립해나갔고 훗날 8월 종파사건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김일성의 이러한 모습은 1957년 [[천리마 운동]]의 실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4대 노선의 발표 등으로 실제 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론화 작업 역시 (김일성이 직접 했다는 북한의 주접과는 달리) 사상비서 김창만, 김일 등 인텔리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황장엽]] 역시 1958년 노동당 비서실 이론서기로 임용되어 나치의 파시즘을 참조해 주체사상을 다듬는 임무를 맡았다. 다만 민족주의를 강화하여 외부의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핵심 담론은 분명히 김일성이 제시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중소결렬]]을 틈타 독자노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1962~1964년 사이 소련과, 1967~1969년 사이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주체사상은 1962년 12월 19일자 노동신문의 기사인 <1952년 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의 역사적 의의>을 통해서 언론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우리 당이 자기행동에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는 근본 원칙'으로 규정되었다. 1965년 4월, 인도네시아의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을 방문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란 연설을 통해 자신의 4대 노선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를 북한의 지도사상으로 정식으로 제시하였다. 1966년 8월 12일 [[로동신문]]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란 기사를 통해서 주체 확립을 위한 8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자기 머리로 사고해야 한다. * 2. 자기 힘을 믿어야 한다. * 3. 맑스-레닌주의는 행동의 지침이다. * 4. 남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 5. 민족적 긍지를 가져야 한다. * 6. 자립적 민족경제는 자주성의 물질적 기초이다. * 7. 자주성을 서로 존중하여야 한다. * 8. 자주성을 견제하면서 반제공동투쟁을 강화하자. 1967년 5월 [[갑산파 숙청 사건]]으로 최후의 방해꾼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 회의를 소집, 주체사상을 '공화국 정부의 모든 정책과 활동에서 확고부동한 지침'으로 선언하였다. 이 시기의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북한 사정에 맞는 '창조적 적용'을 위한 반사대주의 실천 이데올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성립과 발달 배경은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혁명전통을 강조하면서 김일성 우상화를 뒷받침하였다. 다만 분명한 민족주의적 담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민족주의란 용어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사상으로 거부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