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체사상/역사 (문단 편집) == 발전기(1970~1982) == 1970년대에 들어서 주체사상은 후계 구도의 정립 과정에서 순수 이데올로기, 국제적 이데올로기로의 확장을 거듭하게 된다. [[황장엽]]의 인간중심론이 가미되면서 관념론적 성격이 더해진 것도 이 시기다. 황장엽은 1966년 필화 사건으로 곤욕을 치를 뻔 했으나 스탈린 개인독재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기초하여 마르크스의 계급 중심 이론을 인간 중심으로 수정한 새로운 사상이론을 가져오게 된다. 황장엽의 이론은 1968~1970년 사이에 완성되었으며, 1970년 10월,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주체사상이 당의 확고부동한 지도사상이라고 선언했으며,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 제4조는 "맑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중심론이 드러난 것은 1972년 9월, 김일성과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였다.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라고 명명된 서면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체사상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 있다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입니다. (...) 이와 같은 사상은 결코 우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맑스-레닌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이와 같은 사상을 특별히 강조하였을 뿐입니다." 황장엽과 그의 주장을 수용한 정성장, 백학순 등의 설명에 따르면, 황장엽의 인간중심론적 주체사상은 김정일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조직지도부장으로 2인자였던 [[김영주(북한)|김영주]]는 주체사상에 대해 반대하며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김일성이 김정일의 손을 들어주면서 숙청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선전선동부 부부장 출신 탈북자 박병엽과 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 정창현 등은 김영주 은퇴의 원인에 대해서 다른 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황장엽의 영향을 받은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1974년 2월 12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극하여 당중앙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맑스-레닌주의보다 동등, 심지어 우월하다는 주장을 슬금슬금하기 시작했는데, 2월 19일 개최된 전국선전일군강습회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맑스-레닌주의를 50년 전, 100년 전의 낡은 사상으로 비판하며 새 시대에는 새 사상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연설을 하였다. 이는 당연히 주체사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설제목을 보면 [[김일성주의]]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김정일은 1973년부터 김일성주의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해당 주장이 나온 김정일선집은 1992년인데 반해, 1987년의 김정일선집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는 것은 유의해야 할 점.] 이렇듯 김일성주의로의 격상은 김정일의 손으로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서 자신이 마르크스, 레닌보다 위대하다는 소리냐면서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제를 김정일 자신이 물려받기 위해 '재생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정일은 여기에 더해 조총련을 통해 일본으로 주체사상을 전파하였고, 아프리카, 동남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 주체사상 수출에 나섰다. 1970년대 후반에 설립된 주체사상연구소가 주체사상 수출을 주도했다. 이러한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은지 지금도 미국, 서유럽에 주체사상 연구소조니, 선구사상 연구회니, 김일성-김정일주의 연구회니 하는 괴조직들이 상당수 남아있으며 이들은 남북관계에 불화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북한을 옹호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도 보답인지 이들을 북으로 가끔 초청한다. 하지만 김일성주의 선포와 김정일의 주체사상 해석 독점 노력은 환영받지만은 않았다. 김정일은 1976년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옳게 인식할 데 대하여"란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991년 발표된 <조선로동당력사>에서는 김정일의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로 수정돼서 출판되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전혀 굴하지 않고 주체사상의 정립화를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사회 유기체론을 도입하여 수령을 국가의 뇌수로 규정하고, 수령으로부터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기독교 영생관스러운 개념을 도입한 것이 1970년대 초중반의 이론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김정일은 삼촌 김영주가 1967년 작성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수정하여 1974년 4월에 다시 발표하였다. 이 10대 원칙의 10번 조항은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라는 문구를 통해서 김정일 세습을 노골적으로 암시하였다. 1980년 개최된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는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승격시켰으며, 그해 노동당 규약에서 맑스-레닌주의는 지도이념에서 삭제하였다. 1982년에는 평양에 [[주체사상탑]]이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