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페이더 (문단 편집) === [[반장전쟁]]과 [[초공작전]] === ||[[파일:국민당 가입이후의 주페이더.jpg]] || || 국민당 가입이후의 주페이더 || 강서성 정부주석 재임 중인 1928년 6월, [[추수폭동]] 이후 정강산을 점거하고 유격전을 벌이는 [[마오쩌둥]]을 토벌하기 위해 2개 단을 보냈으나 소득이 없었고 11월, 호남-강서 양성 초비 총지휘관에 임명되어 정강산을 공격했으나 1월에 [[허젠]]에게 총지휘 자리를 대행하게 했다. 1929년 [[편견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편견위원에 임명되어 제1 편견구 주임을 맡았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해임하고 [[허젠]]을 무단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토역군을 조직하여 주페이더를 1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우한을 공격하게 했고 주페이더는 [[한푸쥐]], 유치와 함께 광서군을 몰아내고 우한을 함락시켰다. 1929년 6월, 국민당 3기 2중전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차 장풍전쟁]] 이후 8월 1일 난징에서 재개된 편견실시회의에 참여, 편견 실시에 대해 논했다. 1929년 9월 강서성 정부주석에서 해임되어 [[루디핑]]에게 자리를 내주고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3월 2일 [[장제스]], [[위유런]],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우징헝]] 등 12명과 함께 훈정 시기 약법 제정을 건의하였다. 이후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면서 국민정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금주에 이르자 12월 8일 특별외교위원회에서 금주에 주둔한 중국군을 철수시키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만약 쌍방이 전투 상태에 돌입한다면 1주일도 안되어 원조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일본과 싸울 것인지 아니면 일본과 협의하여 방법을 강구할 것인지를 선택하면서 금주에서의 철수와 일본과 교섭을 주장했고 [[다이지타오]]의 찬성을 받았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군정부장 [[허잉친]]과 의논, 상하이 방위를 위해 난징에 주둔한 헌병 6단을 상하이에 증파했다. 1932년 3월, 참모총장에서 사퇴하여 [[장제스]]에게 자리를 내준 다음 군사위원회 변공청 주임을 맡았으며 1933년 12월부터 1934년 12월부터 훈련총감 대행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