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러시아공사관 (문단 편집) === 외교공관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러시아공사관 최초 설계도.png|width=100%]]}}} || || {{{#000 '''러시아공사관 최초 설계도[*A [[https://gallery.v.daum.net/p/premium/sabatin|사진 출처 - Daum 갤러리: 문화재청,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 1884년([[고종(대한제국)|고종]] 21년) [[조러관계#s-2.3|조로수호통상조약]][* '로(露)'는 러시아를 한자로 쓴 '노서아(露西亞)'의 앞글자이다. 즉 조선과 러시아가 맺은 조약이란 뜻이다.]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러시아 제국|러시아]] 정부는 [[공사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당시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카를 베베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사경리국 소속 [[건축가]] 류뱌노프에게 설계를 부탁하고 일본인 하도급자인 치오고에게 견적 및 도면 작성을 맡겼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공사 중인 러시아공사관.png|width=100%]]}}} || || {{{#000 '''공사 중인 러시아공사관[*A]'''}}} || 그러나 처음 설계안대로 지으려했더니 예산을 너무 많이 쓰게 생겨 원래 계획대로 짓지 못했다. 1888년(고종 25년) 이후에 우크라이나인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ій Іванович Середін-Сабаті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리며, 근대기 [[서울특별시|서울]]과 [[인천광역시|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을 고용해 예산을 새로 짜고 설계안을 고쳐 1890년(고종 27년)에 공사를 끝냈다.[[https://gallery.v.daum.net/p/premium/sabatin|#]][* 사바틴은 1883년(고종 20년)에 처음 조선에 온 이후 인천에 머물렀고, 1888년에야 [[경복궁/건축물#s-3.6|경복궁 건청궁]] 관문각 공사를 위해 [[한성부]]로 올라왔다.] 이는 서양식 건축형태를 지닌 첫 [[외교공관]]이었다.[* 최초의 외교공관은 [[주한미국공사관|미국공사관]]이고 그 후 [[주한영국대사관|영국 외교공관]]이 러시아공사관보다 먼저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은 한옥이었다. 미국공사관은 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영국공관은 1891년(고종 28년)에 서양식 건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러시아]]를 [[음차]]한 아라사(俄羅斯) / 노서아(露西亞) 공사관, 줄여서 [[아관|아관(俄館)]] / 노관(露館)으로 불렀다.[* 노서아 / 노관보다는 아라사 / 아관으로 더 많이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