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일본공사관 (문단 편집) == 역사 ==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일본 제국|일제]]는 4년 뒤인 1879년(고종 16년)에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부사 요시모토|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임명한 뒤 조선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인은 [[한성부|한성]] [[사대문안]]에서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부사는 [[돈의문]] 밖 [[천연동]]에 있는 경기중군영을 공사관으로 삼고 그곳에 입주했다. 경기중군영은 조선 후기 경기도 순영의 지휘관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에서 맑고(淸) 차가운 물(水)이 솟아난다 하여 '청수관(淸水館)'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군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했다.] >반접관 홍우창이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A 《고종실록》 번역판에는 '요시'''타다''''로 적혀있으나 '요시'''모토''''가 맞다.]가 청수관에 들어왔다고 보고하다 >---- >반접관(伴接官) 홍우창(洪祐昌)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A]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이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淸水館)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1879년]] 4월 24일(정묘)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1604024_001|#]] 1년 뒤인 1880년(고종 17년) 11월에 하나부사가 정식 공사로 임명받으면서 청수관은 정식으로 공사관이 되었다. 이는 조선이 외국과 근대식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 처음 생긴 외교공관이었다. >일본 판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A]와 수원들이 청수관에 들어오다 >---- >반접관(伴接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A]와 수원(隨員) 4인(人), 함장(艦長) 1인, 전어관(傳語官) 2인, 호위병(護衛兵) 22명, 순사(巡査) 10명, 종자(從者) 2명이 오늘 술시(戌時) 경에 청수관(淸水館)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1880년]] 11월 16일(경진)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11016_00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 공사관 습격.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오군란 직후 청수관.png|width=100%]]}}} || || {{{#b0313f,#ce4e5c '''임오군란 때 습격받는 일본공사관'''}}} || {{{#b0313f,#ce4e5c '''불탄 일본공사관'''}}} || 1882년(고종 19년)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구식 군인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공사관 직원 3명이 살해당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하나부사]]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인천광역시|인천]]으로 도주했다. 이때 공사관 건물도 불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교동 일본공사관.png|width=100%]]}}} || || {{{#b0313f,#ce4e5c '''교동 일본공사관'''}}} || 청수관이 불탄 후 일본공사관 측은 교동[*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관훈동 일대.]에 새 공사관을 짓기로 하고, 1882년(고종 19년) 8월부터 [[남산(서울)|남산]] 밑, 지금의 예장동에 있는 이종승(李鐘承)의 집을 임시로 빌려 입주했다. 1년 8개월 뒤인 1884년(고종 21년)에는 교동에 있는 [[박영효]]의 집으로 옮겨 새로 짓는 공사관의 완성된 건물과 함께 사용했다. 새 공사관은 그해 11월 [[천황탄생일|천장절]]에 맞춰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1달 뒤에 [[갑신정변]]으로 다시 불타 사라졌다.[*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다시 갈 곳이 없어진 일본 공사관은 1885년(고종 22년) 1월 3일부터 전 경기감사 [[김보현(1826)|김보현]]의 집과 [[선화당|경기감영 선화당]]에 잠시 머물렀다. [[일본 제국|일제]]는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및 피해 보상을 위해 [[조선]]과 《[[한성조약]]》을 체결했고, 그 중 4조에 의거해 공사관 부지 및 건축비를 조선 측에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1885년(고종 22년) 1월 12일에 예장동으로 옮겼고 서양식 공관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부터 일본인들의 한성 거주가 허용되자 일본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살았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곳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건축)|성]]을 쌓았던 곳이라 하여 '왜성대(倭城臺)' 혹은 '왜장대(倭將臺)'라 불렀다. 그리고 이 왜성대 일본공사관은 [[일본 제국|일제]]의 조선 침략 핵심 기지가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는 서양식 공관을 완공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109921_40138_1822.jpg|width=100%]]}}} || || {{{#b0313f,#ce4e5c '''남산에 있었던 일본공사관 건물. 한국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는 [[을사조약|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시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공사관은 한동안 유지되었다가 이듬해인 1906년(광무 10년) 2월에 [[한국통감부]]의 신설로 폐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통감부]] 문서 참조. 구 일본공사관 건물은 통감관저로 바뀌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에 이른바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했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식 발표를 하면서 조선왕조는 518년 역사를 끝으로 멸망했고, 조선은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6일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개편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식민통치기관으로 기능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문서 참조. [[8.15 광복]] 후 20년 뒤인 1965년에 [[대한민국|대한민국]]과 [[일본]]은 [[한일관계|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일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주한일본대사관]]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