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일본공사관 (문단 편집) ==== 구 통감관저 ====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 >1940년 11월 22일 《[[매일신보]]》 기사. 통감관저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1946년 4월에는 국립민족박물관이 들어섰고, 1950년에 국립민족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되면서 남산 분관으로 쓰였다. 1954년 6월에는 신설된 연합참모본부가 입주했고 국립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갔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 >1960년 9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통감관저를 국무총리 관저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져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후 이 일대는 완전히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었고, 구 통감관저 건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10820017301782_thumb_400.jpg|width=100%]]}}} || || {{{#b0313f,#ce4e5c '''통감관저 알림 표석'''}}} || 건물은 현재 헐려 사라진 상태이며 언제 헐렸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한동안 이 자리는 그냥 빈 터로 남았으며 통감관저 터임을 알리는 그 어떤 구조물도 없었다. 그러다 2003년 경부터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가 각종 자료를 뒤지며 3년간 추적하고 고증한 끝에 2005년에야 거의 망각에 빠진 통감관저 터를 찾아냈다. 그후 이순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경술국치가 시작된 '통감관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고자 노력했지만, [[서울특별시]]와 [[중구(서울)|중구청]]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했다가 2010년 8월 29일에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표석을 세울 수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NxqjCrvNms)]}}} || || {{{#b0313f,#ce4e5c '''서울특별시에서 제작한 〈경술국치 106주년, 남산 통감관저터에 들어선 위안부 기억의 터〉 영상 '''}}} || 2016년 8월 2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통감관저 터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 피해기록, 일제 만행 기록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를 조성하여 개장했다. 대지의 눈[*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구조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란 문구가 상단에 있고, 그 옆에는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 〈끌려감〉이 조각되어 있다.], 세상의 배꼽[* 인위적으로 다듬은 큰 돌(배꼽을 형상화) 사방에 다듬지 않은 여러 돌들이 놓여있는 공간. 큰 돌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구절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총 4개 국어로 새겨져있다.]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기릴 수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0081701690001300_P2.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hani.co.kr/125073549412_20090821.jpg|width=100%]]}}} || || {{{#b0313f,#ce4e5c '''통감관저 앞에 있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 || {{{#b0313f,#ce4e5c '''잔디밭에 파묻힌 하야시 곤스케 동상 좌대의 판석'''}}} || 일제가 사용하던 시절 이곳에 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도 있었는데, [[8.15 광복]] 이후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이 2005년 8월 구 통감관저 터를 찾다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던 좌대에 쓰인 판석 몇 점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2010년에는 판석에 새긴 명문을 누군가가 훼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는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판석을 모아 야외에 거꾸로 세워서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http://world.kbs.co.kr/service/news_view.htm?lang=k&Seq_Code=245521|KBS 보도]] 좌대 위에 있던 동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