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준가르 (문단 편집) === 갈단 한[* 튀르크계와 몽골계 종족들이 사용하는 칭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주로 '칸'이라고 한다.] 즉위, 청나라와의 대립 === [[청나라|청]]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 청으로선 반드시 족쳐야하는 것이 변방을 자꾸 약탈하는 몽골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두고두고 골칫거리라서 그렇다. 실제로 역대 중원왕조들이 변방의 유목민족들을 제대로 토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중원에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유목민족들이 공격해왔다.]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였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계 종족들은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 한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갈단은 준가르의 첫 홍 타이지인 바투르(Bātur)의 둘째아들이며, 원래 승려였으나 아버지의 후계자 및 형인 셍게가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피살당하자 환속해 준가르를 평정했다. 그 전까지 홍 타이지의 칭호를 쓰던 갈단은 이전까지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 호쇼트 부족은 셍게의 아내인 아누다라의 출신 부족이며 당시 지도자는 구시 한이었다. 셍게가 죽자 갈단은 유목민 관습에 따라 형수를 아내로 맞았다.]을 정복하며 준가르를 통합하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홍 타이지를 거쳐 '보쇽투 한'(Bošoqtu Xān)의 칭호를 받았다. 갈단은 한때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던 경력 및 고승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로 공인받은 인연으로 티베트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혔다.[* 참고자료: 배석규, 대몽골 시간여행.] ||[[파일:1024px-Storming_of_the_Camp_at_Gadan-Ola.jpg|width=100%]]|| ||[[파일:external/file2.instiz.net/058a30471bfb4a93f53fa59078aa5408.jpg|width=100%]]|| || 청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 >갈단의 부와 인구는 서역을 장악했다. 그는 모래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흙을 구워 유황을 추출하고 황산을 이용하여 초석을 만들었다. 구리, 납,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다. 준마와 오랑캐 기수의 규모에서 그들을 능가할 자들이 없었다. ... 갈단은 질 좋은 무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기에 군용 자재를 멀리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고리 미늘을 연결하여 [[사슬 갑옷]](Chain mail)을 만들었는데, 마치 직물처럼 가벼웠다. '''만약 화살이 이를 뚫으면 그는 갑옷 제작자를 죽였다.''' 또한 그는 회회족에 사절을 보내 화약 무기 사용법과 전술, 즉 먼저 총을 쓴 뒤 활과 검으로 싸우는 전법을 가르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총, 소검, 활과 화살을 휴대시키고 허리에 단도를 착용시켰다. 그들의 천둥 같은 고함을 들은 이들은 원근을 불문하고 항복했다. >---- >진변기략 1687 1688년에 갈단이 외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을 틈타[* 당시 할하는 자삭투 한과 [[젭춘담바 후툭투]]의 동생 투시예투 한이 내분을 벌였는데, 갈단은 자삭투 한을 지원했으나 갈단의 동생이 투시예투 한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웬사 투르크는 몽골 활불인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스승이었고,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를 자처한 갈단은 1688년에 할하에서 열린 회담에 달라이 라마의 대리인(간단사원 좌주)과 젭춘담바가 동석에 앉자 아니꼽게 여겨 할하를 침공할 때 젭춘담바가 머물던 [[에르데네 조 사원|에르데니 사원]]을 공격했다. 피신한 젭춘담바는 강희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청나라령 외몽골을 공격하자,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 적봉에서 준가르군을 격퇴한 뒤, 몽골 고원으로 갈단을 추격하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갈단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인 테렐지, 준모드에서 1696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후 반격을 노렸지만 본국에서 조카인 체왕 랍탄이 반란을 일으키고[* 체왕 랍탄은 셍게의 아들이며, 그가 장성하자 왕위를 노릴 걸 경계한 갈단이 숙청을 시도하자 도망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갈단이 외몽골에서 패배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티베트와의 연락도 끊긴 와중에[* 당시 티베트는 갈단을 지지하던 달라이 라마 5세가 사망하고 6세가 즉위하기까지의 과도기였고, 섭정인 상게 갸초는 체왕 랍탄을 지지했다.]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97년에 객사했고 시신은 청나라에서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인구수(준가르는 60만 정도), 농업 생산력, 기술력 등 여러 면에서 뒤쳐져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