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준가르 (문단 편집) === 멸망 === 하지만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 제국]]을 세운 [[몽골 제국]]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약해져 갔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한 후 [[청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준비 끝에 본격적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 이는 외몽골, 신강, 티베트도 이런 방식으로 경영했다.] 자기가 혼자 대빵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물론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무르사나는 청군에게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갔고 결국 이역만리인 러시아에서 죽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Battle_of_Oroi-Jalatu.jpg|width=6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가르가 복속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였고, 피해가 막심해지자 단단히 빡친 건륭제는 준가르를 복속시킨다는 것을 포기하고 초강경책을 꺼냈는데 그것은 바로 아예 '''멸족'''시키기로 결정한것이다. 건륭제는 장수들에게 지시하여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준가르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족에 대한 멸족 시도를 발뺌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실제로 이 건륭제의 무자비한 학살은 당시 청나라 장군들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장군들중에서 사령관인 하다하와 아구이는 학살에 경악하여 점령만 하고 준가르인들이 도망가게 놔두자 이로 인해 처벌받았고 자오후이와 슈헤데 장군은 학살에 경악하여 적극적으로 하지않자 처벌했다.] 것에서 이미... 특히 러시아의 기록들에서도 준가르인들이 청군에게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학살당했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든 노인이든 가릴 거 없이 죽였다고 하며 설상가상격으로 [[천연두]]까지 돌면서 결국 준가르인은 건륭제의 [[제노사이드]]로 무려 '''최소 80%, 최대 90% 이상'''이나 사망했다. 그나마 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준가르인들조차 소수에 불과했으며 이들도 러시아 제국이나 카자흐로 도망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동화되거나 아니면 청나라에 붙잡혀서 노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후자의 경우는 [[만주족]]이나 [[내몽골 자치구|내몽골인]] 내지는 [[한족]]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생존자들조차 모두 여성들이었다. 특히 건륭제는 준가르의 힘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남성과 아이들을 골라내서 철저하게 잡아죽였다. 이 학살은 당시 청나라에서도 경악할 정도였지만, 건륭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특히 건륭제는 준가르는 철저하게 문명이 아니며 야만인인 오랑캐이자 인간이 아닌 존재로 오랑캐를 쓸어버려야 중원이 안전하고 하늘은 황제를 지지한다고 정당화했다. 이렇게 준가르는 멸족당하고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 후 건륭제는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켰다. 사실 이렇게 반란지의 본보기로 포로에 대한 대학살을 하는 것은 청나라의 전통이었으며, 이후 [[태평천국의 난]] 당시에도 수도였던 남경이 함락되자, 남경에 있던 장정들을 모조리 처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준가르와 같은 유목민족을 그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중원왕조들을 위협했기에 건륭제 입장에서는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사실 역대 중원왕조들이 북방 유목민들에게 시달린 이유가 그들의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토벌을 해도 세력을 보존한 유목민들이 힘을 회복하여 중원왕조들의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피해를 입히고 중원이 막장으로 갈 때는 기회를 잡아 내륙까지 공격하여 멸망시키기까지 했다.] 실제로 이렇게 준가르가 소멸하여서 청나라는 변방이 안정되었다. 건륭제는 준가르한테 얼마나 질렸던지 중국 내에서 준가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로써 준가르는 나라는 물론 종족 자체가 소멸했다. 준가르족이 소멸한 자리에 청나라는 완전한 영토로 만들기 위해 자신들에게 복속한 한족, 위구르족, 회족(回族)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이 침략하기 이전에 신장지역에 준가르인이 60만, 위구르인이 37만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이후 신장지역은 위구르인이 번영하게 되었다. 청은 준가르를 평정한 이후 이리에 텐산 남북로를 관할하는 판사대신과 협판대신을 파견하고 주요 거점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1768년 청은 이 지역을 새로이 개척한 강역이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고 개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