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구(대전광역시) (문단 편집) === '''[[석교동(대전)|석교동]]''' === 관할 법정동은 석교동·옥계동·호동이다. 석교동은 대전군 외남면에 속했으나 언제 대전부에 편입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옥계동과 호동 또한 외남면에 속했으나 1940년에 산내면으로 넘어갔고 1963년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인구는 '''14,997명'''.[*P ] 석교동과 옥계동은 [[대전천]]과 관련된 지명이며, 그 사이에 낀 호동은 보문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산골 동네인 '범골'에서 유래하였다. 현 중구와 동구의 경계지역이며, 대전직할시가 출범하기 전에는 대덕군 산내면과 맞닿아 있었다. 옛부터 이곳에는 [[남(성씨)#s-3.3|고성 남씨]] 집안이 터를 잡고 살았으며, 조선시대에 남분봉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봉소루(鳳巢樓)가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아직도 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석교동은 구도심의 변두리에 위치한 주거지역이며 고층 아파트가 전혀 없이 주택과 저층 연립주택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건너편의 가오동은 80년대부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던 반면에 석교동은 아직까지 70년대에 지어진 시영주택들이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쪽의 보문산으로 인한 고도제한이 발목을 잡은 게 컸다고 하지만 해제된 후에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1971년에 대전에서 최초로 지어진 1개동 4층 규모의 제일아파트가 있긴 하지만 워낙 노후된데다 2020년까지만 해도 수돗물 공급이 안되어 지하수를 끌어다 쓸 정도로 상당히 열악한 시설을 자랑했다. 이렇게 묵은 동네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젊은 층의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현재는 주민 연령층이 상당히 높다.[* 중구가 대전의 중심지였던 시절에는 베드타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석교동에도 젊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의 자녀들이 다니던 석교초등학교는 학생이 너무 몰리는 통에 옥계초등학교가 개교하여 분산을 하기 전까지 반 학생이 많아서 교실이 미어터지다 못해 오전·오후반까지 운영을 할 정도로 포화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나누었던 학교를 다시 합쳐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학생 수가 줄었다.] 학교는 석교초, 옥계초, 동명중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