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권법 (문단 편집) == 문파 및 인물 == 오늘날 어느 정도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유명 무술가는 아래와 같다. * 진왕정(陳王廷, 1600?~1680?) [[중국]] [[하남성]] 온현 진가구 진씨 [[태극권]] 창시 * 희제가(姬際可, 1602~1680) [[심의육합권]] 창시 * 왕랑(王朗, 명말~청초) [[당랑권]] 창시 * 진장흥(陳長興, 1771~1853) 양로선에게 [[태극권]] 전수 * 진청평(陳淸萍, 1795~1868) 조보가 [[태극권]] 창시 * 양로선(楊露蟬, 1799~1872) 양씨 [[태극권]] 시조 * 동해천(董海川, 1799~1882) [[팔괘장]] 창시 * 진향(陳享, 1806~1875) [[채리불권]] 창시 * 이낙능(李洛能, 1808~1890) [[형의권]] 창시 * 무우양(武禹襄, 1812~1880) 무식 [[태극권]] 창시 * 철교삼(鐵橋三, 1813~1886) [[홍가권]] * 이경염(李景炎, 1825~1893) 홀뢰가 [[태극권]] 창시 * 양찬(梁贊, 1826~1901) [[영춘권]] * [[곽운심]](郭雲深, 1829~1900) [[형의권]] * 오전우(吳全佑, 1834~1902) 오식 [[태극권]] 창시 * 윤복 (尹福, 1841~1909) [[팔괘장]] * 정정화(程廷華, 1843~1900) 정파 [[팔괘장]] 창시 * [[황비홍]](黃飛鴻, 1847~1924) [[홍가권]] * 진화순(陳華順, 1849~1913) [[영춘권]] * 강화룡(姜化龍, 1853~1924) [[당랑권]] * 양진포(梁振蒲, 1856~1933) 양파 [[팔괘장]] 창시 * [[이서문]](李書文, 1864~1934) [[팔극권]] * [[곽원갑]](藿元甲, 1868~1910) [[연청권]], [[정무문|정무체육회]] 창설, [[정무체조학교]] 설립 * 손록당(孫祿堂, 1861~1932) 손식 [[태극권]] 창시 * 상운상(尙雲祥, 1864~1937) [[형의권]] * 왕향제(王向齊, 1886~1963) [[대성권|의권]] 창시 * 진발과(陳發科, 1887~1957) 진씨 [[태극권]] * [[엽문]](葉問, 1893~1972) [[이소룡]]에게 [[영춘권]] 전수 * 마영도(馬英圖, 1898~1959) [[벽괘장]], [[팔극권]] * 이자명(李子鳴, 1900~1993) [[팔괘장]] 3대 전인 * [[이소룡]](李小龍, 1940~1973) [[절권도]] 창시 (단 이소룡은 미국 국적이고, 배운 무술도 중국무술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연도를 보면 창시 이래 400년 된 것조차 찾기 힘들고, 오히려 특정 시기, 특히 명/청 시대에 집중적으로 융성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나마 400년 가량의 역사를 가졌다는 무술들도 창시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일례로,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태극권은 그 시작을 두고 분파별로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다르다. 태극권의 대표적인 분파로는 진가와 양가가 있는데, 진가측의 주장에 따르면 태극권은 400년 역사를 갖춘 게 되지만, 양가측의 주장에 따르면 송나라까지 기원이 올라가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무술이 된다. 물론 이건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소리고 전설에 불과하다, 확실한 부분만 계산하면 양가 태극권의 역사는 사실상 100년 가량으로, 진가측 주장에 비해 4분의 1로 줄어든다. 문제는 양가측이 내세우는 신화 수준의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진가측의 주장 역시 그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는 것. 진가측은 '태극권은 본래 문외불출의 비전' 운운하고 있는데, 문외불출이란 문중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음을 뜻한다. 즉, 진가측은 제3자에게 검증받을 수 없던 정보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는 셈. 또한, '''문외불출''' 상태로 있었던 시절의 태극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기록된 사료가 없고,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해봐야 진가의 조상님 누구누구가 권법을 가르치고 다녔더라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냉병기가 전장의 주역이던 과거에는 무가(武家)는 물론이요 어느 정도 자리 잡힌 가문이라면 병장기를 수련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가전무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것. 때문에 무술을 교습해줬다는 사실만을 놓고서는 누군가가 어느 무술의 창시자라는 것을 증명해 낼 길이 없다. 현대 태극권은 명백하게 무파태극권의 창시자인 무우양이 진청평에게 전해받은 진가소가 내지는 조보가의 바탕 위에 태극권경의 이론을 적용하여 창조한 권술에 크게 신세를 지고 있다. 얼추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심의육합권의 경우도 창시 시점이 불투명한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는 창시와 관련해서 소림사가 엮여있는데, 해당 시기의 소림사는 사방에서 싸움 좀 한다는 폭력 사범들이 피신처로 애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표현을 간단히 했을 때의 이야기고, 이 상황에는 명말기에서 청초기까지 국가 체제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야기된 복잡한 역사상의 문제들이 엮여있다. 물론, 그 당시 진짜 폭력사범들이 소림사에 기어들어갔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현대에도 폭력 전과자 등이 종교 조직을 이용하여 신분 세탁을 시도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 하지만, 소림사에 들어온 것은 폭력사범들만이 아니었다. 국가 체제의 전환기에 정치적 문제로 실각 내지는 실직한 장수며 무인들이 상당했고, 이들이 찾던 피난처 중 하나가 소림사였던 것. 이들은 당대 지배 계층이 보기에 범죄자 내지는 예비 범죄자들이었겠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망명자에 가깝다.]. 이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었겠지만, 명말청초 시대의 소림사에는 체계화된 무술 교습 체계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창시자인 희제가의 무술과 소림사의 무술 중 어느 것이 원형인지에 대한 주장조차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는 판이다. 뻔하게 예측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엇갈리는 것은 어느 쪽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건 결정적인 증거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또한, 송태조장권처럼 문헌상으로만 이름이 확인될 뿐 이미 [[실전]](失傳)된 무술도 많으며, 다른 무술에 흡수, 합병되어 재편되거나, 반대로 다른 무술의 요소를 적극 받아들여 계속 진화해온 것도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예가 당랑권. 여기는 아예 여러 문파의 기술을 집대성하였다는 점이 세일즈 포인트다. 근대에 이르러 홍콩 출신의 세계적인 영화배우였고, '''인지도만으로 따지면 세계적인 무술가'''이기도 했던 이소룡이 절권도라는 개념을 내세운 이후 새로운 중국 권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