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권법/실전 (문단 편집) === 폐쇄적인 전수 시스템 === 고대 이후 중세의 서양 세계는 상당 기간 동안 무인들이 주도하던 --난장판--시대였던 만큼 군사학 및 병기술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 무술의 진화과정은 상세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맨손무술은 물론 군용무술인 병기술과 마상무예, 군대의 포진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자료는 무려 고대부터 발견된다. '5000년 역사' 운운하는 중국 무술은 과거 자료가 거의 없는 반면, 서양 무술은 실제로 족히 2천 년 전 고전기 그리스, 로마시대까지 자료가 있기 때문.[* 중국권법은 고대에 맨손무술 또는 그래플링을 총칭했던 각력(角力), 상박(相撲) 등을 제외하면 "xx권"이라 하나의 무명(武名)을 가진 무술이 나오는 것들은 대다수가 청나라 말기이며 이러한 기록들 또한 그 어느 것도 수련법이나 싸우는 양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반면, 중국의 전통무술은 모두 하나같이 이전 기록[* 단, 중국무술 역시 진식 [[태극권]]처럼 명말청초에 생긴 무술 등 사료가 남아있는 것들은 추적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유행하는 중국무술들은 옛날 서적에 나온 무술들이 아니다. ]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19세기 동안 약 100년 전후 기간 내에 일제히 역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곧 청나라 말에 해당된다. [[청나라]] 말로 접어들어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향촌질서와 경제가 붕괴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지방 호족이나 향리 등 신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사회계층, 계급의 수입 및 생활이 불안정해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는데, 소위 '무술가'들이 죄다 그 계층이었다. 이렇게 수입이 끊긴 무술가들은 달리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보니, 기존에는 엄격한 [[일자전승]]의 원칙 아래 비밀리에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밑천 삼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대가로 교습비나 재물을 받았다. 살길 막막해진 무술인들이 일제히 도장을 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오면서 평화가 찾아오자 먹고 살길 막막해진 사무라이들이 검술도장을 일제히 개업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기존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무술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이면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당시의 도장/문파 시스템은 오늘날처럼 '돈을 주고 배운다.'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느 문파의 일원이 되면 사실상 도제관계로 그 문파 아래 완전히 종속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장문인, 도장주 및 사범들은 교습만을 하는 전업 무술인이었으고 그 아래 학생들은 생업과 무술단련을 겸하였다. 이런 연유로 무술은 말 그대로 '''밥줄'''이었다. 이전까지는 혈연 가족들 사이에서만 폐쇄적으로 전승하던 무술은 이 시대에 이르러 일종의 상업적 도제관계로 변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소위 '''전설적 고수들'''이 한꺼번에 출몰하는 것이다. [[팔극권]]의 [[이서문]], [[형의권]]의 [[곽운심]]과 상운상, [[홍가권]]의 [[황비홍]], 연청권의 [[곽원갑]], [[태극권]]의 [[양로선]], [[팔괘장]]의 동해천, [[영춘권]]의 [[엽문]] 등등등... 오늘날 알려진 유명한 유파들은 전부 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고수의 전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고수들이 실제로 강했는지와는 전혀 별개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떠한 경로든 무술을 익힌 후에 먹고 살길을 찾아 자기 두 주먹만 갖고 세상에 나와 떠돌며 이런저런 일화를 남기며 출세를 꿈꿨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고수의 전설 중 9할이 넘는 전설들은 실제 고증을 따지고 들어가면 허무맹랑한 것들 뿐이다, 아래 후술될 내용도 있지만 구체적인 거짓전설을 하나 예시로 들면 [[태극권|손식태극권]]의 개파조사인 손록당의 전설 속에 출연하며 [[다이쇼 덴노]]가 직접 지명한 일본 최고의 무술가이자 "대정천황특급훈장"을 수여 받았지만 늙은 손록당에게 일방적으로 구타 당하고 손록당에게 2만 엔을 주며 일본에서 [[중국권법]]을 교습해달라고 얘기한 판원일웅(板垣一雄)이라는 일본 가라테 챔피언은 [[바이두]] 백과와 같은 중화권 위키에만 존재하며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및 일본 위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일본은 맨손무술 중 [[유도]]를 최고로 쳤고 [[가라테]]는 식민지 격인 오키나와의 싸움패 주먹질 무술이라며 천시하였으니 만약 이 판원일웅이 진짜 [[천황|덴노]]가 직접 지명한 일본 최고의 무술가라면 최소한 유도가였을 것이지 결코 가라테 챔피언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 정도의 무술가라면 무명일리도 없다.] 즉, 먹고 살길 막막해진 혼란한 중국의 사회상에서 무술인들은 무술교습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그렇게 무술을 배운 사람들은 사회 각지로 퍼져나가 그 무술을 내세워 출세를 꿈꿨다. 일반적으로 유명세를 타면 부유한 신흥계급에게 고용되어 후원을 받으며 개인 교습자가 되거나, 야심찬 군벌들에게 고용되어 훈련교관이 되거나, 특출한 재주를 높이 사서 황궁의 관리가 되는 등 출세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 문파의 도장을 세우든 부유한 후원자를 얻든, 일단 유명해지면 제자들이 모여 곧 주된 수입원이 된다. 이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은 '''다른 무술가와 대결하고 지는 것'''이다. 즉, 이때의 [[도장 깨기]]는 무술가가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이었고, 반대로 이미 그러한 것을 얻은 무술가들에게는 패망의 길이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19세기 전후로 일제히 출몰했으니 그만큼 상호교류의 기회가 늘어 중국무술의 실전성이 --서로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절절히 깨닫고-- 오히려 강화되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생계의 수단으로 도장/문파 시스템 아래 놓이게 된 만큼 기존보다 대량의 인원을 상대로 교습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정예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던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열화되었다. 투로와 형에만 집중하는 교습법은 여러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 오랫동안 가르칠수록 수입이 오래 동안 보장되는 셈이니, 기술들을 매우 천천히 가르치는 교습자들도 등장하였다. 오랜 전수 기간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신수양을 들먹임은 덤.[* 진식[[태극권]]을 간화시키고 천천히 가르치는 체계가 바로 양로선(楊露蟬)의 손자 양징보(楊澄浦)가 창안한 양식태극권이다, 양로선은 진식태극권을 했고 그 양로선에게 기술을 전해받은 양징보가 진식태극권의 기술들을 큼직하게 분해조립해서 현재의 느릿느릿한 양식태극권을 만들고 양로선을 조사로 추대한 것.][* 비슷한 사례로 한 때의 한국 [[권투]] 체육관들도 정신수양 운운하면서 권투는 안 가르쳐주고 몇 개월씩 [[줄넘기]]만 시키곤 했다. 2020년 기준으로 이런 권투장들은 많이 도태된 상태.] * 세상에 등장하는 무술이 많아질수록 세상에 먼저 나와 자리잡은 각 문파는 기득권이 되었으므로 새로 등장하는 문파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조폭]] [[나와바리]] 싸움을 생각하면 된다. 소위 이게 중국 영화 등에서 묘사되는 문파간 갈등의 실제 모습이었다. 결국 대형 문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위상이 깎이면서 이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 우려가 있는 공개적인 교류, 시합, 대련 등을 철저하게 금하고 내적으로 폐쇄적으로 변했고, 소규모 문파들은 이런 추세에 맞춰 '시장을 분할한' 안정상태에 순응하였다. * 전통무술이라고 해도 무술의 목적은 당연히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무술가끼리 싸우면 승패에 따라 해당 문파의 체면이 크게 좌우되고, 곧 생계곤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공개적인 대결을 금지했다.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철저하게 비공개 합의로 행했고, 혹시나 체면이 손상되거나 악소문이 퍼진다면 대상에게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등, 그야말로 [[조폭]]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 이런 상황에서 신비주의와 허풍이 한 가지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이 때문에 자기 문파 권사들의 활약을 저마다 크게 부풀려 소문을 내었다. 그리하여 동시대에 수많은 '''고수들 이야기'''가 나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고수들은 서로 우열을 가린 사례가 아예 없다. '''전설적 권사들이 대결한'''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 사례는 없다시피하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서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우열을 가린 후 헤어졌다.'는 식이다. 소위 '전설적인 권사'들이 직접 맞붙은 거의 유일한 사례가 바로 태극권 양로선과 팔괘장 동해천이 한 결투인데, --당연하게도-- 그 전말은 알려진 바 없고 이 또한 구전에 불과하다. '며칠을 싸워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만 알려졌을 뿐이다. 당시 중국 무술계의 밥그릇 싸움은 2015년작 중국 영화인 〈사부: 영춘권 마스터〉[* 원제목은 師父. 영문제목 The Final Master.]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