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어/역사 (문단 편집) == 상세 == 옛날 중국어는 대부분의 형태소가 한 음절로 된 언어였다. 또한 대부분의 단어들이 하나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단어도 단음절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부터 두 개 이상의 한자를 모아 하나의 단어를 만드는 경향이 강해진다. 예를 들어, 和과 平이 합해져서 和平(평화의 중국어 단어)가 된다. 따라서, 현대 중국어의 단어들는 대체로 둘 이상의 음절을 갖는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어의 한자음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중고한어가 쓰이던 시기(특히 [[당나라]])는 [[중원]]의 문화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시기였기에 [[한자문화권]] 국가의 한자 발음이 대부분 이 시기에 유래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한 본격적으로 [[장강]] 이남을 넘어 우이산맥~난링산맥 이남까지 이주하던 한족이 생기던 시기였기에 [[객가어]], [[광동어]] 등의 방언에는 중고한어의 흔적이 비교적 더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와 객가어의 한자 발음이 가장 유사하다고도 한다. 사실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중세 한국어]]의 흔적이 [[경기 방언]]([[서울 방언]])보다 [[제주 방언]], [[동북 방언]], [[경상 방언]] 등에 더 많이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언어는 화자의 수가 많을수록 더 빠르게 변화하기 마련인데, 예로부터 압도적으로 많은 화자 수를 보유했던 [[관화]]를 바탕으로 하는 [[표준중국어]]는 발음의 변화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쉽게 위키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열람이 많은 문서일수록 편집 횟수가 많아져서 문서 내용이 더 많이 변할 것이다.][* [[https://i.imgur.com/qvTDkZn.png|한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원후 2년경 중국 대륙 인구 밀도 지도.png]][[https://www.reddit.com/user/Fornadan/|출처]]] 애초에 중세의 언어가 태초의 모습도 아닐뿐더러, 언어는 빠르든 느리든 계속 변하고 이는 관화나 남부 방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이산맥~난링산맥 이남으로 이주한 한족은 토착민과 교류하고 [[통혼]] [[혼혈]]하며 유전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사회 문화적 주류는 여전히 한족이었기에 언어적 주도권은 유지했겠지만, 변화가 없지는 않았다. 화자 수가 많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변화가 느렸을 뿐이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9/htm_2004090818291440004300-001.GIF|#]] 조기관화로 넘어오면서 전탁음(유성음)이 없어지고 입성(받침음)이 없어지고, /m/ 받침음이 /n/으로 통합되며, 성조도 4성으로 줄었다. 원대 이후로 명청시대도 이 근고음을 주언어로 쓰다가 [[태평천국의 난]],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반란들과 [[아편전쟁]], [[청불전쟁]], [[청일전쟁]] 같은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혼란기였던 청나라 말기에는(특히 19세기~20세기초) gi [ki] (끼), ki [kʰi] (키), hi [xi] (히)음이 각각 현대음으로 바뀌면서 ji [t͡ɕi] (찌), qi [t͡ɕʰi] (치), xi [ɕi] (씨)로 구개음화되었다. 이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 北京, 南京의 발음으로, 명청시절 강회 관화는 구개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를 뻐낑(혹은 뻬낑), 난낑으로 발음했고 이후 구개음화되어 뻬이찡(Beijing, 베이징), 난찡(Nanjing, 난징)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 열강이 [[북경]], [[난징|남경]]을 Peking, Nanking(예전 표기 방식으로는 무기음 g {/k/}와 유기음 k {/kʰ/}를 구별하지 않고 둘 다 k로 적는다)이라 적은 것은 이 영향이다. [[웨이드-자일스 표기법]]도 북경 관화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Pei-ching, Nan-ching과 같이 적으며 Peking, Nanking은 그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쓰였던 강회 관화를 기준으로 한 표기이지 웨이드-자일스식 표기가 아니다.] 15세기에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도 청나라 중기까지는 강회 관화가 행정 표준어로 쓰였는데, 오늘날에도 난징에서는 北가 '뻬이' 대신 '뻐'로 발음된다. 일부 관화 방언(주로 산동성 동부 해안가)이나 남방 방언엔 이러한 구개음화영향이 없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이어 들어선 [[장제스]] 시기 [[중화민국]]에서 베이징 관화를 중화민국 국어라는 이름의 국가 표준어로 제정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대만]](중화민국)에서도 국어라는 이름으로 표준어 규범이 되어 있다. 한편 [[국공내전]]의 결과로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중화민국 국어를 약간 수정한 후 민족간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대한족주의]]의 성격이 강하게 나는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보통화"라는 명칭으로 공용어로 제정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60년대에 독립한 [[싱가포르]]에서도 중국계 주민의 의사소통을 위해 표준관화를 싱가포르 표준 화어(華語)라는 이름으로 국가 공용어 중 하나로 지정했다. 이 [[국어|중화민국 국어]], [[보통화]], 또는 싱가포르 표준 화어가 오늘날 우리가 '중국어'라 알고 있는 [[표준중국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