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 (문단 편집) ===== 건축 ===== [[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이때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하게 되어 일시 건축학이 퇴보 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시대에 [[콘크리트]]를 한 차례 개발해 [[판테온]]이나 [[수도교]], [[아파트]]([[인술라]]) 등 여러 건축물을 만들 때 쓰다가 서로마 제국 멸망을 전후해 기술이 한 번 잊혀져버린 것이다.[* [[동로마 제국]]에서조차도 고대 서로마 전성기의 콘크리트 건축 기술력은 잊혀졌다.] 콘크리트가 다시 발명된 건 근대에 포틀랜드 시멘트를 발명하면서였다. 결국 초기 중세 유럽인들은 쉽게 무너지는 [[벽돌]]로 건물을 만들었고 섬세함도 비교적 뒤떨어졌다. 10~11세기 고딕 양식이 서서히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돌만 좀 쌓아올리다가 얼굴 내밀만한 창문 하나 정도 만들고 지붕은 기둥이나 그런 게 지탱해서, 벽의 구성이 자유로워진 게 아닌 두껍고 투박한 벽이 모든 것을 지탱해야 했으니. 또한 로마 건축물이 남은 곳에서 사람들이 돌을 마구마구 빼와서 건축자재로 써서 유적이 많이 소실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까지도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 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축은 [[성당]]이나 일부 성이나 궁전, 공공 건물에만 반영되었고 앞서 상술되듯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했고, 특히 알프스 이북의 경우 아예 제반 기술이 붕괴되었기에 벽돌 만드는 방법마저 실전되었다. 초기 알프스 이북의 경우 사회 인프라 시설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대부분 목재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성마저 11세기까지는 목재로 지어졌다. 이때 가옥은 나무로 된 틀, 욋가지에 흙을 바른 벽, 그리고 짚 등으로 이어진 지붕으로 2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하나는 길이 20~50피트(6.1~15.24m), 폭은 15피트(4.572m)의 가옥과 길이 6m, 폭이 3m인 원형 오두막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은 썩 튼튼한 건물들이 아니었기에 도둑들이 간단하게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했고, 단칸방이라 한 가족들이 한방에서 모여서 생활했고, 대체적으로 축사까지 겹쳐있는 형식이라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http://badoleblog.blogspot.kr/2011/06/mon-pantheon-sempe.html|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 참고로 우리나라도 현재까지 함경도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이러한 구조의 민간 가옥들이 있다.[[https://m.blog.naver.com/kjn3814/110141593350|함경도 전통가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7d6551045b21b5d368472f4fa7a1571.jpg]]}}} || || 중세 가정집 ||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팀버프레임|하프 팀버(팀버프레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과 [[중부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과 [[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細長型)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각박한 시대인지라 탑처럼 생긴 주택도 유행했는데 탑상 주택, 또는 탑주택이라 불렸고, [[서유럽]]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동유럽]]의 코카서스 지방에도 탑상 주택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상 주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도시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과장을 보텐다면 한 도시에 평균 100여 개의 탑상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질세라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탑상 주택이 나타날 때가 12세기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내부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기에 같은 도시, 같은 도시내의 구역을 차지한, 각기 이해관계가 일치한 귀족들이 모여 계약을 맺은 콘소르테리아를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를 둘려싸는 형상으로 크고 작은 탑상 주택을 철책을 두르듯이 집합시켜 방어의 효과를 높였고, 각 탑상주택은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어 발코니에서 공동체의 적에 대한 감시와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중정을 두었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중정 쪽으로 돌출된 회랑을 통해 피신했고, 이밖에도 우무르 부뚜막, 땔감 창고 등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높은 탑을 세워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배치했다. 대체로 탑상 주택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일층은 보통 아치로 된 한두 개 정도의 출입구가 있었고, 각 층마다, 작은 개구부를 한두 개 정도 설치되어 있어 폐쇄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배열도 불규칙한 경우가 많았다. 일층은 금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 있었고, 이층은 거실 및 식당이 그 상층부에는 침실이 있었다. 부엌은 보통 맨 위층에 자리했는데, 굴뚝도 없는 화덕이 설치되어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실내에 연기가 가득 차였다고 한다. 지하에는 와인 창고와 조명용 기름을 만드는 작업장을 두었다. 그 외에도 외부에는 상점을 세놓았고, 내부에는 고용인의 주거 공간과 작업장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탑상 주택은 처음의 실용적 용도와는 다르게 시간이 가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한 사치재가 되었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나 현대의 [[마천루]]처럼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인 용도로 지어졌다. 13세기 말 도시 내부가 안정을 되찾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는 귀족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정치의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사적으로 짓는 탑이나 탑상주택의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이들의 탑을 일정한 높이까지 줄여버렸다. 현대의 탑상주택의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곳으로 블로냐와 산 지니마노다. 탑상 주택의 높이는 최대 90m에 이르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케이드 주택이란 유형도 있었는데, 주로 광장과 큰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2층을 집 앞 보도 위까지 도출시킨 뒤 도출 부분을 [[아케이드]]로 처리한 유형으로 도출 부분을 보도 끝에서 아치로 받쳤는데 도일한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들이 줄지어 서서 아케이드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아케이드 주택은 2층을 지탱하는 천장이 보행로를 덮어 보행자가 돌출 부분 밑을 터널처럼 통과하는데, 이경우 어둡고, 습해지며 보안에도 불리한 단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장점이 많았다. 우선 아케이드 주택은 주로 상가 주택으로 지어졌다. 중세 유럽의 도시 주택들은 세장형 형태의 단독 주택이 주류로 상가주택 또한 단독 주택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층이 상가나 공방으로 사용되었다면 2층부터가 건물 주인의 사적 공간이었다, 이는 인구밀도가 높은 비좁은 중세 도시에서 최대한 쾌적하게 살기 위해 건폐율 높은 맞벽(party wall) 구조와 함께 2층을 보도 위로 도출 시켜 건물 주인 일가의 사적 공간의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도시적 측면에서 두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전자의 경우 1층 상가와 보행자에게 안전 덮개를 제공했는데, 만일 비가 왔을 때 비바람으로 부터 보행자와 상가를 보호해줬을 뿐만 아니라 우천시에도 쇼핑을 할 수 있어 상업적으로 매출 증대에도 도움이 되었고, 이는 세수증대로도 이어졌다. 후자의 경우 아치가 일렬로 이어져 있어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특이한 조경 요소가 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대로 중세 유럽의 도시는 대체로 고려와 조선의 [[읍성]]과 비교하면 도시 내부의 면적이 좁으면서 인구밀도가 고밀도 수준이었다. 때문에 후기로 접어들면서 건물끼리 맞다는 맞벽 구조로 건폐율이 높아졌다. 아케이드 주택은 도시 내의 열악한 과밀상황을 조형적으로 활용해 도시 경관을 특이하게 연출했다. 서로마가 붕괴되면서 귀족들의 도시 저택인 도무스 또한 사라지면서 왕과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한 중세 귀족들이었던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장원 주택이나 성관에서 살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상공업의 부흥가 함께 프랑스에선 왕권 강화와 함께 관료제를 실시하면서 소수의 약소 귀족들이 도시로 이주 및 도시의 상인들이 부호로 성장하면서 다시 도시 저택들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각각 [[호텔]]과 팔라쪼로 불렸다, 초기엔 그저 새장형 주택 그 자체이거나 약간 규모를 크게 한 것 밖에 없었으나 점차 규모가 더 큰 저택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의 팔라쪼는 안뜰이 사각형의 중정이 있는 ㅁ자 구조의 건물로 이후 중세 후기에 발생한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과밀한 도시 내부의 특정상 후원이 없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으나 프랑스의 호텔의 경우 16세기 이전까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ㄷ자 구조인데다가 귀족들의 권력이 시민들을 압도했기에 건물 규모에 비해 넓은 후원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중세 당시의 팔라쪼로는 [[https://it.wikipedia.org/wiki/Palazzo_Spini_Feroni|팔라쪼 스피니 펠로니]]와 [[https://it.wikipedia.org/wiki/Palazzo_Davanzati|팔라쪼 다반차니]], 호텔은 [[https://fr.wikipedia.org/wiki/H%C3%B4tel_des_archev%C3%AAques_de_Sens|센스 대주교 저택]]과 [[https://fr.wikipedia.org/wiki/H%C3%B4tel_de_Cluny|클루니 호텔]]로 현존하는 중세 호텔이다.] [[https://blog.naver.com/cccani/221225555311|관련 이미지]], [[https://blog.naver.com/ohryan77/221410953756|이미지 2]], [[https://blog.naver.com/ohryan77/221431896782|15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 주거]], [[https://blog.naver.com/ohryan77/221237181149|중세 유럽의 목조 농가]], [[https://paris-atlas-historique.fr/48.html|중세 파리의 도시 저택(불어주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