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 (문단 편집) ==== 교육 및 학문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6%91_%EC%A4%91%EC%84%B8%EC%9D%98_%EA%B5%90%EC%9C%A1|#]],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84%B8_%EC%A0%84%EA%B8%B0%EC%9D%98_%EA%B5%90%EC%9C%A1|##]],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84%B8_%ED%9B%84%EA%B8%B0%EC%9D%98_%EA%B5%90%EC%9C%A1|###]] 모든 지식인들이 교회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학]] 이외의 학문이 탄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중세 교회는 지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관대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문들이 신학 위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스콜라 철학|스콜라 학파]]가 있다.[*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야훼|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권장되었으나 에피쿠로스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종종 폄하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의 입장과는 별개로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일부 교수의 경우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다르다는 이른바 '이중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충돌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탄압받게 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구]]와 [[수도원]]에 '''[[초등학교]]''' 정확히 사원 학교와 수도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 이때의 교육 대상들은 주로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카롤루스 대제 이전인 597년 브리튼 제도에서 켄터베리에서 킹스 스쿨이 설립되었으며, 세속인들도 대상으로 하는 초·중등교육 기관은 12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해 독일에서 습자학교, 영국에선 조합학교 등이 설립되기 시작한다.[[https://blog.naver.com/try2quit/222192967860|#]][[https://vkdlfl11.tistory.com/295|##]] 이러한 세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또한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으며, 교사들은 주로 가톨릭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로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 [[코임브라 대학교]], [[카를로바 대학교]],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등 '''서구권 최초의 [[대학]]들'''이 세워진 것도 중세 시대 때이다. 특히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마침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던 [[논리학]]자이자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가 교수진의 일원이었기에, 당시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의 학구열은 엄청났다. >"파리 대학교는 전 세계를 위하여 빵을 굽는 오븐과 같다."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쾰른 대학교]] 등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본적으로 [[3학4과]]를 배웠으며 그 외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 M.H.Shank 저작 참조.] 당시 대학교에서 그 외에 메이저 학과로 소문난 분야들은 [[라틴어]], 고전문학,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 수학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기 위한 커트라인은 최소 12세(!) 이상이었으며, '''농민 출신이라 해도 다 받아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의 기회 자체가 상당히 균등하게 주어졌던 것. 다만, 이때의 대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사/학생 길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서 교수는 장인, 학생의 경우 도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대학들이 세워졌으며 유럽 전역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볼로냐 대학교]]는 법학자 이르네리우스 하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외국인 유학생만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파도바 대학교]]는 볼로냐의 일부 학생과 교수진이 분리되어 별도로 창설한 학교인데 13세기에 이미 1만 8천 명의 학생이 있었다.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뿌리깊은 편견도 있는데, 사실 중세인들은 지구가 명백히 둥글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 [[로저 베이컨]] 등 수많은 중세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의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남겨 놓았다. 또한 일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들은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제로는 중세시대의 연구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한다. 중세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뛰쳐나와 새로 과학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