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 (문단 편집) ==== 의학과 위생 ==== * [[http://oldman79.egloos.com/4247263|요약]], [[https://gall.dcinside.com/m/paradox/160204|위의 글에서 잘려나간 뒷내용]] 중세에 대한 폄훼 과정에서 제일 큰 오명을 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의학과 위생이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회자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해서 특별히 뒤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중세 의학에서 가장 흔한 형식의 치료는 약물요법이었다. 이런 약초들의 종류와 각각의 사용법의 경우 지역의 문화나 토속 종교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중세의 의사들은 4체액설에 대입시켜 나름대로 다시 재구상해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를 doctrine of signatures 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골무꽃 씨앗은 두통 치료제로, 폐병풀 잎은 결핵 치료에, 좁쌀풀은 눈 관련 질병 치료애 사용했으며 울타리쐐기풀을 소독제의 용도로 사용했다.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짓는 능력은 약효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부분 [[의료행위]]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단일 약재가 처방될 때도 있었고 여러 약재가 혼합 처방될 때도 있었다. 약재의 성분은 대부분이 약초였지만 동물이나 광물이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6세기가 되자 이런 약초학의 발전에 따라 치료 물질, 즉 재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 지식인들의 영향도 받았다.]을 번역했으며, [[볼로냐 대학교]] 등 대학들도 식물학을 직접 개발하고 연구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했는데, 이때 인쇄술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어쨋든 이렇게 식물에 대한 원전 텍스트와 이를 응용하는 약물학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묶임으로써 식물 연구가 급속히 발전했고, 의학과 철학, 약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후일 [[근세]]에 [[마녀사냥]]의 영향을 받아 살짝 주춤하기도 했지만 한편 이런 연구를 널리 보급한건 당연하지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들은 대규모의 허브 정원을 설치하는 등 약초학이 널리 퍼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원래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병은 신의 벌 또는 악마가 주는 고통이기 때문에 회개만이 치유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하는데, 교회에서는 이것을 궁극적 치료자는 신이지만 인간은 의료행위를 통해 인간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석해 의학에 정당성을 실어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편견과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질병의 원인에서 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지 않았기에'''[* 개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단적으로 흑사병의 경우 물론 신이 원인이지만 병은 결국 자연적인 일이고 그 자연적인 원인을 일으키는게 신이라고 보는게 교회의 입장이었다. 즉 신성 말고 자연적인 원안도 인정했다는 것. ] 교회는 히포크라테스 4체액설을 옹호했으며, 특히 수도원은 약초 및 식물에 관련한 문헌들을 엄청나게 기록하거나 번역하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하고, 또 이런 번역한 것들을 퍼트리는 역학을 수행했다. 특히 치료행위의 경우 베네딕트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외과수술도 매우 초보적이지만 이루어졌는데, 10세기경 [[고대 영어]]로 작성된 잉글랜드의 의학서 ''Bald's Leechbook''에는 창자가 비어져 나온 상처를 수술하기 전 약초를 우려낸 물에 손을 담그라든가, 비단실로 수술 부위를 봉합한 다음 계란 흰자로 만든 연고를 바르는 등 체계적인 외과수술 방법이 정리돼 있다. 이후 중세 후기가 되면서 이런 작업들이 성당으로 이관되었으며, 앞에서도 말했듯 대학에서도 이를 제도화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근대적 의학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는데, 일례로 영혼과 육체에 관한 논쟁은 뜬금없게도 해부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갈레누스의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외과 의학도 발전했다. 또한 당대 최고 인기 학문인 천문학-점성술도 의학 이론으로 동원되었으며, 이런 여러 계통과 학파들이 경합하며 경쟁적으로 다른 이론으로 병리학을 설명하려 했다. 또 이론과 별개로 경험적 지식도 축적되어서, 흑사병 시기에는 도시에서 빠져나가 전원 지대로 피난하는 것이나 가축의 도시 출입을 막거나 40일간 해외에서 온 배를 격리하는 등의 방역도 시도되었다. 흑사병의 증세를 살펴 가래톳 흑사병과 폐렴성 흑사병이 다름을 이미 파악한 의사도 존재했다. 가끔 보면 [[좆문가|자칭 역사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중세 때는 의료행위를 불경하게 여겼기 때문에 의사들을 다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개소리다. 한편, 정신병에 대한 치료는 통일되지 않고 의사별로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의사는 마녀나 악마가 정신병을 일으킨다고 믿어 기도와 퇴마를 통해() 치료하려고 한 반면, 어떤 의사는 정신병은 악령이 몸에 씌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악령을 나가게 하기 위해 '''두개골을 절개해서'''[* 천두라고 하는데, 고대 종교나 민간 의학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화타]]를 보자. 이런 방식이 쓰이기도 했다는건 중세 의학이 (초기에는) 이교나 고대 민간의학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는것을 의미한다.] 어떤 악령이라도 나가게 만듦으로써 치료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중세 의학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거짓만은 아니었던 셈인데, 다만 '''당시에도 이런 방식을 쓰는 의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4체액설에 따라 정신병을 해석하려 하였으며, 장기의 오작동이나 체액의 불균형을 원인으로 꼽고는 했다. 그중 흑담액이 과도하게 나와서 정신병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헌다. 목욕 문화가 실전되었느니 도시에 상하수도가 없었느니 하는 낭설도 돌지만, 전부 거짓.[* 오물을 집 밖에서 길거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는 로마 시대 하층민 주거지에도 존재했던 관습이다.] 사람들이 죄다 목욕을 안한 사회였으면 목욕을 자주 안한 수도자가 금욕주의를 철저히 지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목욕을 안하는 것이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는 것이다.[* 다만 중세 후기 [[흑사병]]이 돌자 목욕탕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쇠퇴하긴 했지만 중세 말기쯤에 쇠퇴했지 대부분의 중세 시대 땐 목욕이 일상적이였다. 그리고 이 낭설도 아예 허구는 아니였는데 지금과 달리 로마시대부터 목욕탕은 생각보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았고 사람이 몰리는 장소였기에 전염병에 취약했다.] 또 수도원, 도시, 성체 등 독립적인 건물이면 으레 수도교가 존재했다. 또 중세인들은 빗물이 제일 순수한 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모아 상수로 쓰는 시설도 설치되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만 봐도 수도교가 달려 있다. 중세인들은 위생 관념이 있을만큼 있었고,[* 영국의 리처드 2세가 "Statuto quo nul ject dung"(분뇨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이라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중세인들도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위생과 병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충분히 알았으며 도시가 오염되면 특히 위험하단 것은 잘 알고 있어서 도시 공동체는 도시의 위생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http://charger07.egloos.com/m/4137042|참고]][[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3810768|중세시대에는 로마의 수도관,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이 없을까?]][* 학술자료를 캡처한 자료가 있어 부득이하게 링크했지만,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중세의 수도 시설은 로마의 기술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중세 성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도시 인구가 더욱 증가한 16세기에야 수도와 목욕 시설이 급감하기 시작한다.] 다만 비위생이 병을 일으키는 원리가 파악되었던 것은 아니고 나쁜 냄새가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데[* 흔히 악취설(miasma theory)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역병 의사]]의 특이한 복장도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악취가 세균으로 인한 부패로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엄밀하게는 틀려도 결과론적으로 일리는 있는 이해를 가졌던 셈이다. [[세균]]학이 태동해서 과학적인 의학이 시작되고 근대적 위생 관념이 생겨난 것은 중세가 대충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세기의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의학이나 위생 관념이 대다수의 사람에게 돌아간 혜택은 아니고, 도시가 많은 부유한 지방 위주의 일인데다가 극적으로 중세 유럽인들의 수명을 늘리지도 못했다. 다만 이러한 한계는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이었기에, 특별히 중세 유럽의 의학이 기괴하거나 뒤떨어졌다고 보는 시각은 지양해야 한다. 동아시아도 지네, 전갈, 말벌 등을 약재로 사용했고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서 사람 잡던게 전근대 의학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더럽다는 묘사가 빠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 정작 원주민들은 '쟤들이야말로 더럽다'고 씹었다는 일화가 꽤 있다. 다만 외과술은 여전히 정체 상태였다. 고대서부터 외과의의 신분은 내과의보다 한 단계 낮았으며, 무엇보다 해부학적 지식이 근·현대와 비교하면 일천한 수준으로 13세기부터 대학에 의과가 생겼음에도 정식과목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외과술은 전문의가 아닌 [[이발사]]와 [[망나니]]들이 전담했다. 사족이지만 성직자들도 근·현대의 선교사들처럼 1163년 까지 의료행위를 했으나 이후 교황청에 의해 외과술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화약이 전파되면서 외과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 [[헨리 5세#s-4|몸에 박힌 화살촉을 손 쉽게 제거하는 도구]], 상처 등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거나 끓는 기름을 붓는 방식 대신 압박 혹은 혈관결착과 같은 합리적인 기술로 바뀌게 되었고, 지혈제 또한 덜 독한 약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신마취제가 발명되는 19세기까지 아편과 같은 마약이나 아니면 흡입 마취제에 의지해야 했으며, 사망률 또한 상당히 높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