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 (문단 편집) ===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 === ||[youtube(Cqzq01i2O3U)]|| ||[youtube(zyhcHGrEEkg)]|| ||[[JTBC]] [[차이나는 클라스]] - "암흑시대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다." || || [[파일:attachment/middleage1.jpg|width=350]] || [[파일:attachment/middleage2.jpg|width=450]] || || 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대다수의 판타지물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판타지는 [[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이 경우 서로마가 붕괴되어 개막장 난세가 펼쳐진 중세 초기보다는, 체제가 안정되고 상업이 융성하던 중세 말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온다.]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서양에서는 판타지 팬이 아니라도 기사, 갑옷, 공성전 등을 좋아하는 밀덕, 역사덕후들이 갖는 중세 로망도 많다. 오히려 이와 대비되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오해가 강하게 자리잡혔다. 그리고 픽션이라도 그런 중세의 현시창 분위기를 더 크게 어필하면 [[다크 판타지]]물이 된다. 즉 중세시대와 중세시대 픽션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어두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셈인데, 어느 방향이든 인기와 인지도는 많고 논란도 많은 메이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암흑시대의 의미는 '[[교회]]의 억압에 의해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둠의 중세시대'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2가지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 || ||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그리스도교]]-[[가톨릭]]) 때문인가? || 일단 결론을 내리자면 '''둘 다 아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농노나 평민들도 자기네 시대가 암흑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도 아니었고,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서로마 멸망 후 [[혼돈의 카오스]]인 시대 상황에서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중들에게 중세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편견이 박혀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라는 역사학적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세의 이미지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했던 행복의 시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생각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추악한 시대'라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고전과 당대라는 2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소거되어야 할 쓰레기였다. 이렇듯 중세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까기 위한 목적으로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중세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때까지는 중세라는 표현은 물론 어떤 특정한 시대를 지칭한다거나 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다. 이러한 편의적 사용을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죠반니 안드레아가 고대-중세-근현대라는 3시대 구분법에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다. 1469년 교황청 사서 조반니 안드레아는 중세란 표현이 '낡은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근대인'들의 구분을 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출신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부터 중세를 폄하하는 경향이 더 번성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조르조 바사리]]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들로부터 사용된 것이지만, 그 용어를 '시대' 개념으로 정립한 것은 부르크하르트였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고대문화의 부활이자 근현대의 출발점이요, 중세와의 급격한 단절로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의 추종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존 시몬즈는 두 시대를 다음과 같이 확연히 대조시켰다. >'''중세 시대의 정신 상태는 교의(敎義), 권위, [[스콜라 철학|스콜라주의]]와 같은 교회의 우상들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침내 인간의 노력을 위한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며, 그 이래로 인간이 여전히 참여하는 진보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쟁취한 의식적 자유의 역사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19세기 말에 몇몇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를 시작했고, 20세기 초부터는 역사학계에도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었다. 게르만계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도 있었음을 밝혔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연구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칼같이 나누고, 안 좋은 것은 전부 중세로 떠넘긴 다음 르네상스를 숭상하는 태도는 18세기의 소위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맹목적 안티크리스트 정서에서 처음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식이다. 중세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간주되는 [[마녀사냥]], 혹은 이단심문 또한 그 전에는 암암리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세기경부터 본격화된 측면이 있다.] 현재에 와서는 르네상스는 특정한 '르네상스 정신'을 갖추었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즉 르네상스 시대는 고전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신의 시대라기보단 그냥 간단하게 '근대 초'라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새로운 시대라기보다는 중세 문명의 성숙이자 완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암흑시대'라는 부정적 의견은 전문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중세는 서양사의 한 시대에 붙인 이름일 뿐이고, 이 시대는 서구 문화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공헌을 추가했으며, 그 공헌은 공정하고도 편견 없는 연구와 평가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를 서술한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일반 대중들이 [[종교]]의 생활규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secularization)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공중 차원에서의 세속윤리(secular ethics) 담론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실상 현대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시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제한적 의미의 [[암흑시대]]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으며, 중세 초기(476~1050년경)의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하므로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물론 이는 중세 초에 서유럽 문명이 퇴보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만 정치적 혼한기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도 메로빙 왕조나 서고트 왕국은 상당히 많은 사료를 남겼기 때문에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사료가 없지는 않다. 서유럽의 중세초는 동양사로 치면 중국의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연상하면 쉽다. 한나라 정치 질서의 붕괴는 당대인들의 삶에 심각한 고통을 주었으며, 많은 도시들이 초토화되고 인구의 감소와 경제적 혼란을 불렀다. 그러나 이건 '문명의 퇴보'가 아니다. 위촉오이든 서진이든 기존 한나라의 문명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심지어 오랑캐라고 폄하 당하는 침투 왕조들도 기존 중국의 문명과 통치 엘리트 집단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다. 서유럽의 상황도 그러했다. 정치 질서의 붕괴는 분명 고통스러운 재앙이었으나, 게르만 왕국들은 서로마의 통치 엘리트들과 문명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다. 문명은 단절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중세 초는 유럽의 전통적인 '암흑시대' 담론으로 보기보단, 차라리 동양사에서 쓰는 '난세'라는 말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물론 '문명 퇴보'는 아닐지언정 서유럽이 난세를 맞은 건 맞다. 단 이 역시도 중세 초기의 몇 세기에 한정된다. 어쨌든 그래서 동로마는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어느 분이신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등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킨 반면, 서방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가 붕괴되고 난세가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그 자신도 시련을 겪어야 했고, '인류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죄악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등의 사유를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신국론>이라는 명저가 저술되었고, 원죄에 대한 신학도 발전했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유럽인들은 조금씩 난세를 안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질서를 바로 잡은 곳이 서유럽에선 [[교황청]]이었으며, 8세기까지는 종말론을 체감할 만했던 서유럽에서도 9~10세기에는 지역별로 비교적 안정적인 정권이 수립되어, 11세기 무렵부터는 대부분의 외침을 단절시키고 오히려 정치·문화적인 권역을 확장시켰다. 요한 하위징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와는 비교하면서 중세 후기(14-15세기) 프랑스어권을 연구하여 이 시대 프랑스어권은 재생의 시대라기보다 비관주의와 데카당스의 시대를 거쳤다고 보았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 >'''하위징가 '중세의 가을' 中'''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도 로마 붕괴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이로 인한 도시 파괴 등까지 부정한 적은 없으며, 기존에 고대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담아 '퇴보'라 싸잡아 말하던 것에 대하여 상기했던 대로 역사적 연구를 통해 명암을 확실히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가령 중세 초 도시들의 인프라가 후퇴한 건 사실이지만, 사회의 부(富)는 오히려 촌락까지 확산되고, 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한 소농의 비율이 올라가고, 농민의 구매력이 상승하는 모습 또한 보여줬다. 또한 서로마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서방의 국제 교역망에 타격을 주었으나, 서방 경제는 교역망들이 지역화(localization)되면서 결국 활로를 찾았다. 당연히 이는 고대인과 중세인의 지능 차이가 아니라, 거대 제국의 붕괴에 자연히 뒤따르는 삶의 모습들이다. 20세기 오스트리아 역시도 제국 붕괴 후 경제 쇼크를 겼었다.] 또한 상술했듯 아무리 혼란이 있었다 해도 무려 천 년이 넘는 중세 시기가 싸잡혀 암흑시대로 규정당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오늘날 중세사학계에서는 중세 '초'에 대해서도 암흑시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더욱이 기존의 중세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자정하는 것이 비판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미 고대 시대부터 신분제는 고착되었고 노예와 약탈 경제가 주축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 >In fact, it was a time where literature was encouraged and highly-valued, especially by the upper-echelons of Early Middle Age society. >사실, 특히 초기 중세 사회의 상류층에 의해서 문예는 장려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 >'''The term the Dark Ages gained greater usage during the 18th century Enlightenment''' ... >'''"암흑 시대"라는 용어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 > >'''During the 20th century, many historians have rejected the term, arguing that there is a sufficient amount of scholarship and understanding of the Early Middle Ages to make it redundant. However, the term is still used in popular culture and regularly referred to.''' >'''20세기 동안, 많은 역사가들은 이 용어를 거부했다. 초기 중세에 관한 학술과 이해는 이 용어를 폐기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 >It will take time for the term the Dark Ages to fully fall out of use but it is clear that it is an outdated and pejorative term for a period where art, culture and literature flourished across Europe. >"암흑 시대"라는 용어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예술, 문화, 문예가 유럽에서 번창하던 시대에 대해서 이 용어가 구식이고 경멸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 >-Tristan Hughes [[https://www.historyhit.com/why-were-the-early-middle-ages-called-the-dark-ages/|#]][* 위 인용문에선 그냥 Europe이라 언급하지만, 출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건 프랑크, 앵글로색슨 등 서방권이다. 즉 비잔티움 이야기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