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 (문단 편집) ==== 농업 ====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 제국 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6세기경부터 서서히 농경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기술 항목에 카루카라는 신식 [[쟁기]]가 북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것과 [[말|마구]]가 개량된 것이 바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였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이 실시하고 있던 [[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B%B0%A9%EA%B2%BD%EC%A7%80%EC%A0%9C|개방경지제]]가 보편화되고 있었으며,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이 로마 시대에 어떤 취급을 받던 곳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로마 시대에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이집트 등은 중세에도 멀쩡히 부유한 지역으로 살아남아 막강한 국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 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아예 [[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페스트가 지난 후의 후유증은 농업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인구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죽은 자들의 재산들이 전부 산자들의 몫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1인당 농경지의 비율도 증가하게 되는데, 추수기가 되면 더 넓어진 농경지의 곡식을 빨리 추수해야 했기에 기존의 남성 인력들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여성들도 추수 작업에 동참했다. 남성들이 큰 낫을 휘둘러 추수 작업을 시작하면 여성들이 미처 추수되지 못한 곡식들을 작은 낫으로 마저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서유럽과 북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목축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가 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수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애당초 기후 자체가 [[지중해성 기후]]였던 남유럽 지역과는 달리 나머지 지역들은 [[서안 해양성 기후]]와 [[냉대 습윤 기후]]이기에 목축업에 유리한 면이 있었고, 특히 서유럽의 경우 근대를 거치면서 낙농업이 발달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14세기가 되면서 발트해 연안에서 대량으로 곡식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곡식의 공급이 과잉이 되면서 목축업의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