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유치원 운영상의 곡절과 후원회의 조직 ===== 3.1운동을 전후한 1910년대와 1920년대는 우리 민족사 전체가 심한 격동과 변천을 겪은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여파를 가져왔고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었는데, 중앙유치원도 이러한 파장에서 예외적 존재일 수는 없었다. 1916년 창설 이래 유치원의 본보기로 여러 가지 객관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꾸준히 자기 유지/발전을 추구해 온 중앙유치원도 3.1운동이 남긴 거센 여파에 따라 일시적으로 휴원하게 되는 불행을 겪어야만 하였다. 중앙교회는 3.1운동의 첫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중앙교회의 전도사로서 교회 활동의 양 날개격이었던 [[박희도(1889)|박희도]], 김창준이 각기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일제에 체포/구금되어 복역하자 교회는 그 심각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다. 원아의 가정에서도 피검자가 많았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앙유치원은 자연 일시 휴원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3.1운동의 파동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중앙교회에 부임한 이홍주(李泓周) 전도사가 주동이 되어 유치원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브라운리가 중심이 되고 유양호가 설립자가되어 1920년 5월 5일 중앙교회에서 유치원을 다시 열고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랑으로” 라는 애초의 취지 아래 다시 어린이를 가르치게 되었다. 원장에는 유양호, 원감(園監)으로 이홍주 목사가 취임하였고,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나온 박채봉(朴彩鳳), 배애주(裵愛主), 이자성 (李兹成) 세 사람이 보모로 원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모집 인원을 100명으로 하여, 5세에서 8세까지의 어린이를 매일 9시 30분부터 정오까지 오전 수업만 하되 월사금은 50전으로 정하였다. 개원 날까지 38명이 응모하였으나 매일 10여 명씩 늘어났고, 중앙교회가 1919년 가을부터 목조 건물을 벽돌 양옥으로 개축하는 등 유치원 시설에도 주력하여 모범유치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중앙유치원이 부활하기는 하였으나, 그 운영에는 역시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50전이란 ‘봉사적인’ 월사금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유치원 운영의 최저 경비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은 사회 유지에 호소하고 또는 가극대회(歌劇大會)를 열어 비용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경영난으로 고충을 겪던 1921년 가을에 유력한 후원회가 발족되었다. 중앙유치원을 위하여 서울 각처에서 금전 또는 물품으로 기부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1922년 여름의 상황을 잠깐 보면, 이 때 유치원에 대한 인식이 다소 높아감에 따라 자발적인 기부가 유치원에 많이 답지하였고, 각 신문에서는 기부자의 명단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더욱 고무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중앙유치원은 바로 ‘겨레의 정성’ 이 키웠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중앙유치원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였고, 모든 면에서 전국 유치원의 모범이며 대표격이었던 만큼 그 후원과 육성에도 전국적 규모의 성원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겨레의 정성’ 의 대표적인 예로 1920년 9월 통영청년회(統營靑年會)의 후원을 들수 있다. 통영청년회에서는 활동사진반(活動寫眞班)을 조직하여 단장 김재균(金才均) 이하 8명이 전국 각지를 순회/상영하면서 많은 환영을 받았는데,1920년 9월 9~10일 양일간 동아일보사와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후원으로 YMCA회관에서 활동사진회를 개최하였다. 레퍼토리는 서양인의 운동 경기 실황, 희극「오해」, 교육극「무지와 애견」, 사회극「오늬와 광영」, 인정극「고집장이 주인」의 다섯 편으로 모두 단편물이었다. 입장료는 일반이 50전, 학생이 30전으로 비교적 고액이었다. 활동사진이란 문명의 새로운 영역이 지방청년회의 순회 영사회(映寫會)라는 형태로 보급된 것도 흥미롭지만, 그 입장료의 수익금을 모두 중앙유치원에 기부한 것에서, 새로운 문화활동과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이 협동적 유기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앙유치원을 돕겠다는 종로 시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서 중앙유치원은 유지/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겨레의 정성이 아무리 뜨겁다 하더라도, 유치원을 경영함에 있어서 무한정 이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앙유치원은 독자적으로 독립할 방도를 모색하여 중앙유치원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후원회 결성의 계기가 된 것은 1921년 5월에 개최한 가극대회이었다. 이 대회는 유치원 교육의 성과를 과시하는 한편, 입장료 수입으로 유치원의 경영을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개최하였지만, 그 성과는 중앙유치원의 기대 이상이었다. 기부금까지 합하여 1,000원에 달하는 수입이 있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의 관계자들은 각계 각층의 인사가 보여준 따뜻한 관심과 성원에 감동하여, 동포를 위하여 더욱 충실하고 완전한 유치원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교실 하나 없이 교회당 건물을 빌려 쓴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껴 오던 중앙유치원 관계자들은, 30만 한국인이 사는 서울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유치원이 볼 만한 건물 하나 없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는 반성에 일치하여 1921년 5월 중앙유치원을 따로 건설하자는 계획을 추진할 요량으로 중앙유치원 간부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병조, 홍병선, 심명섭 3인을 유치원 확장 기성회 위원으로 추천하고 각계 유지의 기부를 얻어 기필코 훌륭한 유치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