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중앙유치원의 활동과 문화적 공적 ===== 중앙유치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련을 받으면서도 올바른 교육을 시키려는 열의는 식지 않았다. 이 열의가 뭉쳐 중앙유치원의 지위를 굳히고 높였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데 선봉이 되었는데, 그 중 크리스마스 행사는 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크리스마스 축하식은 각 교회마다 개최하였지만, 서울 시내의 성탄 축하식 중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동과 중앙예배당의 그것이었다. 이 때에는 유치원 원아들의 유희와 노래들이 부형을 비롯하여 일반 교인들의 감흥을 자아내게 하였다. 특히 원아들이 총동원되어 상연하는 예수 탄생을 내용으로 한 연극은 재치있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매일신보』 1916년 12월 24일자] 국내에서 착실한 기반을 닦았고 국외적으로도 그 활동이 높이 평가되고 있던 중앙교회를 배경으로 설립된 중앙유치원도 단시일 내에 그 사회적 비중이 높아져, 어린이 교육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문화 향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앙유치원이 갖는 사회적 비중에 따라 이 유치원의 행사는 학부형뿐만 아니라 전 지역 사회의 관심사가 되었다. 중앙유치원에서 개최한 각종 운동회/음악회 행사는 사회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바가 매우 컸다. 일례를 들면 1922년 10월 28일 장충단 공원(獎忠壇公園)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원아 및 가정연합회’ 는 중앙유치원의 연혁에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여성사에서도 널리 주목하여야 할 행사이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동아일보』에서는 감격 어린 필치로 유치원 어린이와 그 자모(姉母)들의 연합운동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파일:external/b18cfc94b6c4af76d14fe7519f0c05f3d9d26173899aff7184ed591fe1c4d6d9.jpg]] >어린 아해들[* '어린이' 란 말이 방정환에 의하여 창도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의 일이었다.]의 자미 있는 운동도 관중의 박수거리가 되었으나 아해들의 어머니들이 다름질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머리 쪽진 아낙네들이 두 손을 부르쥐고 버선발 다름질함은 조선 개벽 이래의 처음이라 일반의 흥미도 일층 더하였음은 무론이요, 우리 가정도 얼마나 열린가를 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28일자] 가정 주부들이 경주한다는 것도 당시로는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었겠지만, 이는 중앙유치원의 사회적 영향력이 바로 사회의 근대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동아일보』의 지적대로 “우리 가정도 얼마나 열린가를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1923년 10월 16일에는 때마침 공진회(共進會)가 개최되어 지방 인사들이 많이 상경하고 있는 데 착안하여 어린이 교육이 얼마나 필요하며, 어린이들에게 좋은 품격과 성질, 건강한 체격을 길러 주는 유치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선전하고 알리기 위하여 중앙유치원에서는 장충단공원에서 추기 대운동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천사 같은 어린이들의 운동경기/체조/유희/노래 등 여러 프로그램을 갖고 일종의 교육 전시를 하여 교육의 효과를 과시하였는데, 중앙유치원은 이와 같은 운동회를 통하여 유치원 교육 보급에 힘썼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