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6절 메디컬센터(M.C.) 건립 지연 사태 ==== 개포동 부지 매입의 무산이후 1989년에서 1991년 2월까지 서울시내 1,000병상 규모 건립 부지를 물색했으나 적지를 찾지 못하였다. 부득이 1991년 2월 부속병원을 흑석동 부속중/고등학교 부지에 건립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부속유치원은 중문 옆 풍치지구로, 부속남/여중학교는 부속여중/고등학교 건물로 통합/이전하고, 부속남/녀고등학교는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통합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1993년 12월 1일에 병원건축을 설계업체로 낙찰히여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병원 건립의 준비단계로 설계납품, 건축허가 접수, 건축허가 취하,건축허가 재접수, 건축허가 등의 과정을 거쳤다. 또한 1994년 1월 26일에는 교통영향 평가를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교통영향평가는 심의/승인을 받았으나, 1996년 12월 30일 교통영향평가 시효만료로 재허가 용역을 체결하여 1997년 6월 2일 심의/승인을 받았다. 1994년 12월에 신축부지에 대한 지질검사 용역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메디컬센터는 곧 착수/완공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1996년 3월에 이전 예정인 부속고등학교는 도곡동 신축 교사의 공사 지연으로 1년간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메디컬센터 착공도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3월 17일 법인은 각 구성원 주체에게 메디컬센터 건립 과정의 지연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시행착오는 계획 추진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되는 등 더 이상 법인의 계획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는 의과대학생 수업거부와 의과대학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다. 이러한 의과대학 구성원의 움직임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4월 23일에는 제2차 의과대학 교수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M.C. 건립에 대한 재단의 자세변화와 10월 착공 무산시 재단퇴진에 교수가 앞장 선다. 학생 및 수련, 전공의는 교수들의 성명서를 믿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 등이었다. 이어 각 언론사 편집국장에게 사학재단 비리척결을 위한 서신을 발송하는 한편 학생과 학부모 230여 명은 감사 촉구를 위한 의대인 결의대회를 제1종합청사앞에서 실시하였다. 특히 의과대학 교수들은 M.C 건립지연에 따른 학내사태 수습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의대생과 전공/수련의 입장에 대해 지지하고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태해결에 앞장선다. >총장과 교무위원들은 사태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하라. >의료원 관리실장은 책임지고 사퇴하라. >금양실업의 수익금을 의료원 환원에 대한 제도적 장치하라. >의대생 및 수련, 전공의는 모든 사항을 교수에게 일임하고 즉시 복귀하라. >이번 사태로 학교당국과 의료원은 의대 학생과 수련 및 전공의에 대한 어떤 불이익이 없도록 보장하라. >이사장은 건설본부장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라. 이에 이사장은 학내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주요한 내용은, "M.C.건설본부를 이사장 직속으로 설치 , M.C 건설본부장은 의대 교수 중에서 임명, M.C. 건설 진척상황을 착공전까지는 2개월마다 착공후는 6개월마다 중대신문에 발표, 법인의 상임이사와 사무처장을 경질, 금양실업 감사 교체, 금양실업의 체계법인 감사자료를 매년 의료원장에게 제출하고 공개, 10월 착공과 착공 이후 공사지연이 없도록 이사장이 M.C. 건립을 책임지고 추진한다" 등 건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97%EB%85%84_9%EC%9B%94_5%EC%9D%BC_%EB%A9%94%EB%94%94%EC%B9%BC%EC%84%BC%ED%84%B0_%EA%B8%B0%EA%B3%B5%EC%8B%9D.jpg]] '''1997년, 메디컬 센터 기공식''' 이사장의 의지 표명 이후 1997년 8월 21일에 M.C. 건립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에 장임원 교수를 선임하는 등 본격적인 M.C. 건립을 추진하였다. 건립부지 내의 구유지 매수 완료, 건설본부사무소 개소, 건축허가, 부속 중/고등학교 철거 완료 등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특히 메디컬센터 건립 기공식은 1997년 11월 1일 거행됨으로써 새로운 면학풍토를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체제로 메디컬센터 추진계획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건립에도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만, 이에 따르는 최신 장비는 엄청난 재정적인 부담이었다. 더욱이 기존 대학병원도 차관에 따른 환차손 등으로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을 맞았다. 물론 교육적인 차원에서 메디컬센터는 의과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무리한 시행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의 전체 교육기관에도 영향을 끼칠 것은 명약관화한사실이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변경되었다. 첫째, 대학부속병원으로서 3차 의료기관의 최소 기준인 500병상 규모로 건립한다. 둘째, 착공시기는 IMF경제관리체제에서 벗어난 99년 하반기에 착공한다. 셋째, 착공시기 이전까지 용산병원이 불하되면 흑석동 M.C.건립계획(안)을 대체 추진한다. 넷째, 컨소시움 참여자에게 경영권 부여하는 자금을 조달한다는 방안이었다. 당시 메디컬센터 건립은 법인의 가장 큰 과제로 복잡한 추진 과정을 거치면서 지리멸렬해가는 가운데 중앙대학교 발전계획의 가장 큰 이슈였다. '''{{{#red,#ff0000 __※ 1998년 이후의 역사는 다양한 견해차이와 논란이 있으므로 『중앙대학교 100년사』(2018년 예정)를 통해 정립이 된 후, 작성하도록 하겠다.__}}}''' [[분류:중앙대학교]] [[분류: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