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유치원 규정의 공포와 유치원의 보급 ===== 1920년대는 교육에 대한 겨레의 열망이 높았고, 독립을 위해서는 어린이부터 훌륭한 한국인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자각도 깊어가고 있었다. 특히 1923년도는 우리 나라 어린이운동의 일대 앙양기었다. ‘어린이’ 라는 고운 말이 처음 생겼고, 『어린이』라는 잡지가 새로 나왔으며, 색동회가 창립되었고, 첫 ‘어린이날’ 행사가 5월 1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고하자 중앙유치원은 그 해 가을에 100여 명이나 되는 지원자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는데, 협소한 교실 사정을 무릅쓰고 150여 명의 원아를 가르쳐야 하였으므로, 부족한 교실의 신축을 위하여 당국으로부터 7만 원의 기부 금품 모집 허가를 얻어 모금함으로써 바야흐로 확장과 발전을 위한 준비기에 올라섰다. 어린이운동이 활발하여지자 유치원에 대한 이해와 협조 또한 높아져 총독부에서는 1922년 2월 16일자로 부령(府令) 제11호로 소학교령에 포함된「유치원규정」을 공포하였다. 1920년대의 유치원은 초창기에 비하며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유치원 자체도 질과 양에서 크게 향상되면서, 더욱 큰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시급히 요망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보모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은 사범과를 설치하여 우리 손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보모를 양성하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