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유치사범과의 설립 ===== 3.1운동은 각 방면에 걸쳐서 그 후 모든 운동에 있어서 전진의 초석이요 출발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겨레의 내일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는 가장 주목할 만하였다. 이 때 많은 새 조류가 생기고 새 싹이 텄다. 특히 어린이를 잘 보살피고 대우하는 것이 문명사회라는 자각이 뜻있는 이의 공통된 구호였으므로 보육 운동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보육 운동에는 이전부터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인들의 지도를 받아 몇몇 개인이 설립한 유치원이었고, 또 하나는 선교사들이 전도에 뜻을 두고 설립한 유치원들이었다. 그러나 중앙유치원이 설립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으니, 이 유치원이 순전히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워지고 유지된 사실은 종래의 보육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 영향도 매우 커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적으로 유치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당연히 다수의 보모를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보모 양성이란 새로운 과제가 교육계에 제기되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중앙유치원은 1922년 9월 원내에 사범과를 두었다. 이 일을 맡아 노력한 이가 유각경(劉珏卿)과 차사백(車士白)이었다. 유각경은 일찍이 정신(貞信) 여학교를 마치고 중국에 가서 보육을 전공하고 귀국한 인재이었다. 차사백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램버드 보육학교를 마치고 1922년 서울에 돌아와서 중앙유치원에서 활동하면서 중앙유치사범과를 설립하는 데 적극 관여하는 등 초창기 보육 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천진한 어린이의 동무가 되고 그의 어머니가 되어 장래의 제2세 국민을 조선 사람답게 기르자. 조선인의 살길은 어린이로부터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일보』 1928년 3월 22일자]라는 사범과의 설립 정신은 모든 사범과 학생의 흉금에 새겨진 모토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광명으로 이끌 굳건한 민족혼을 지닌 인물을 어린이 때부터 육성해야 하며 “그 사명이 곧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자각은 사제간에 맥맥히 흐르는 유대 의식이었다. 이때 유치사범과는 아래와 같은 표어로 가르쳤다. >귀여운 아이만 귀여워 말고 잘 입은 아이만 잘 대하지 말고 오히려 못 생기고 추해 보이는 아이들을 더 귀여워하는 것이 보모로서 가질 성품 그리하며 모교에서 받은 교육은 일선유치 원에 나아가 원아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게 하여 중앙보육학교 출신은 어느 곳에서든지 환영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