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유치사범과의 경영난 ===== 유치원의 수효가 증가됨에 따라 자격 있는 보모의 수요가 늘어났으므로 중앙유치원의 사범과 시설은 급격한 발전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 사범과를 키워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그 경영에서 심한 재정난을 겪었다. 우선 시설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이었다. 사범과 설치 당시의 시설은 형편없었다. 원래 유치원의 교실도 교회의 방 하나를 빌려 썼으므로 유치원 교육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사범과는 또 유치원의 한 구석에서 강의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사범과 교육에도 애로가 많았으며, 경비 사정은 현상 유지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중앙유치원의 경상비 및 임시비의 정확한 평균 금액은 알 수 없으나,적어도 연간 2,000원을 초과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월사금 수입의 5배 이상일 것이므로 기본 재산이 없는 중앙유치사범과로서는 항상 경영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관계자들은 1924년 2월에 회의를 열어 일반으로부터 기부금을 걷기로 하고 총독부에 금품 모집에 관한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목표액은 70,000원이었으며, 신학년도가 시작되는 3월 안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여 교실 증축과 시설 개선을 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모금의 성적은 부진하여 약간의 시설을 보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때 김근하(金根河)란 사람이 모든 경비를 보조하되 경영진의 일원으로만 참여하겠다는 제의를 해 오자, 이를 수용하여 운영 실무진에도 변동이 있게 되었다. 원장과 원감은 사임하고 5월 24일에 [[최병헌]] 목사가 새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중앙예배당의 장유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운영권은 엡윗청년회에서 맡게 되었다. 이에 김호명(金浩明) 등 이사가 선임되어 전 설립자 박덕유를 위시한 유지와 유치원을 공동 운영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